마라톤은 배려다

by 현도현

[마라톤은 배려다]


섭씨 28도를 훌쩍 넘는 태양 빛이 광기를 품은 듯 쏘아댄다. 결승점 2km 전방쯤에서 앞서 달리던 아가씨가 울부짖다시피 악을 쓰며 허우적거린다. 짧은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달린다. 날씨 영향도 있지만, 하프마라톤 경험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도 힘들 때는 악쓰며 자신을 채근한 경험이 있지만, 욕설을 뱉었던 기억은 많지 않다.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싶다.

어떻게 좀 도와주고 싶은데 특별히 도와줄 방법이 없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최선은 그의 리듬에 맞춰 함께 달리는 것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격려하듯 1km 정도 달렸다.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도 곧장 잘 따라와 주니 내심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나도 힘들어 18km 지점에서 잠깐 걸었던 터라 격려와 응원의 말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호흡이 고르지 않아 말을 꺼내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금 걸어도 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마음 약한 바이러스가 될 것 같아 꾹 참았다.

마라톤은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걷는 상생의 여정이다. 극한의 고통에서는 경쟁에 의한 승부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함께 달리고 서로 격려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인간만이 연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라톤에서는 경쟁보다는 함께하는 배려가 먼저다.

2017년 12월 10일,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열린 'BMW 댈러스 마라톤 대회'에서의 일이다. 여성부 1위로 달리고 있던 뉴욕의 정신과 의사인 '첸들러 셀프'가 결승선을 고작 183m 남기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완전히 풀린 '첸들러 셀프'는 더 이상 뛰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이때 그의 뒤를 바짝 쫓고 있던 2위 주자 에게는 우승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때 2위를 달리고 있던 17세의 고교생 '아리아나 루터먼'은 '첸들러 셀프'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며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다시피 한 '첸들러 셀프'는 몇 번이나 더 쓰러지지만 '아리아나 루터먼'은 "당신은 할 수 있어요. 결승선이 바로 저기 눈앞에 있어요."라며 끊임없이 격려하며 함께 달린다. 그리고 결승선 바로 앞에서 '아리아나 루터먼'은 '첸들러 셀프'의 등을 밀어 그녀가 우승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미국 국민의 시선은 1등을 한 '첸들러 셀프'에게도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냈지만, 그보다 17세 소녀 '아리아나 루터먼'의 위대한 배려심에 더 큰 환호와 찬사를 보냈다. 지구촌에서 함께 공존 공생하는 인류에게 이렇게 뜨거운 감동을 선사한 소녀의 따뜻한 마음을 잠깐 제 가슴에 담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영광이다.


당시 이 사건은 미국에서 논란이 있었다. “보조가 있었던 게 공정했는가”라는 질문이 나왔지만, 대회 측은 셀프의 앞선 격차가 컸기에 승리가 유효하다고 판정했다. 셀프 자신은 이 상황에 대해서 “완전히 연료가 바닥났다”, “다리가 젤리처럼 느껴졌다”라고 설명했다. 굳이 그렇게 따질 일일까. 루터먼은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지만, 대신 인간의 품격을 선택했다. 이 사건에서 공정의 시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1등이면 어떻고, 2등이면 어떤가. 그보다 인간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아름다운 가치를 폄훼하고자 하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진정한 승부는 경쟁이 아니라 배려다. 나는 마라톤 하면서 경쟁에서 꼭 이기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배웠다. 그 바탕 위에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사력을 다했던 아가씨와 마지막까지 함께 달렸다. 걷는 것보다, 느렸을지라도 그는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아 발걸음을 멈추고 마라톤과 영영 벽을 쌓을까 걱정이다. 흔히 마라톤을 자신과 경쟁이라고 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이긴 그녀와 또 한 사람, ‘아리아나 루터먼’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내 앞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신기루 같은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그녀 덕분에 나는 ‘배려의 마라톤’을 배웠다.


[일시] 2024년 5월 19일

[대회] 과천마라톤(관문체육공원 및 양재천 일대)

[기록] 2시간 2분 32초(Ha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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