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3화)
겉과 속이 다름을 표리부동이라 하고 하늘에 맞닿을 상당이라 한다. 산서성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나란히 뻗은 여량산맥과 태행산맥으로 감싸져 있다. 그래서 산서성의 지형은 표리의 산하라 한다.
황하가 여량산맥의 서쪽에서 산맥과 나란히 흐르다가 산맥이 끝나는 남쪽 지역에서 화산에 부닥쳐 동쪽 방향으로 90도 꺾여 중원으로 내닫는다. 여량呂梁은 천지의 척추라는 의미로 여는 척추뼈 량은 대들보를 뜻한다.
태행산맥은 산서성 동측에 위치하며 산맥을 횡단하면 광활한 화북평원이 펼쳐진다. 이처럼 산서성은 긴 두 개의 산맥으로 이뤄져 있고 두 산맥 사이에는 여러 개의 분지가 분포하며 강물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표리의 산하라는 표현은 높은 지역에서 산서성을 내려다보았을 때 모습일 것이다.
또한 산서성의 북쪽에는 유목족과 농경족의 경계 역할을 한 음산산맥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이 산맥을 지나 산서성의 분지를 통과 하면 바로 중원에 닿을 수 있다. 이러한 지형의 특징이 몽고지역의 유목족이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 남쪽으로 침략힐 때 주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농경족은 이들의 남하를 막기 위해 장성과 요새를 쌓고 필사적으로 지켰다.
두 산맥이 산서성의 양대 축이나 지명에 영향을 미친 정도는 상당히 다르다. 여량산맥의 여량산은 대우大禹 가 치수 사업을 위해 물길을 뚫었던 이야기가 있으며 한무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하다 보니 역사 신화 전설에 얽힌 지역이 많고 산 이름을 딴 행정 지명이 생겨났다.
이석산 : 여랑시 이석구 방산 : 방산현 석류산 : 석류현 가란선 : 가란현-유목족 언어 영향 지명
태행산맥의 경우 산서성의 동쪽 등뼈를 이루면서 화복평원의 서측에 병풍처럼 펼쳐 있어 유목족의 침입을 막는 천연 장벽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산맥의 산과 산 사이의 계곡이나 물길을 이용한 유목족의 침입이 자주 있어 중원의 한족은 이곳에 군사요새를 세웠다.
특이하게 산서성 내에서 이 산맥의 영향을 받은 행정지명은 적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지명은 오대산의 오대현뿐이다. 이 지명도 수나라 문제 607년 시기에 명명되어 여량산맥지역 지명보다 비교적 늦게 나타났다.
태행산맥과 좀 떨어진 화북평원 지역에 한단시가 있는데 이는 주변의 감산甘山에서 유래했으며 인근의 탁록은 염황과 치우가 싸웠던 전쟁터로 탁록산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태행산맥 남쪽 끝 부분에 상당분지가 있는데 주변의 산들에 둘러싸인 높은 지역이다. 그 영향으로 나타난 지명이 상당구이다. 이곳은 춘추시대 진나라와 조나라가 나라의 운명을 걸고 싸웠고 결과로 진나라는 통일의 주도권을 갖게 되고 조나라는 쇄락의 길로 접어든다.
산서성 북측에 있는 음산산맥에는 몽골 계통의 영향을 받은 지명이 많다. 이 지역은 유목족과 농경족의 첨예한 대립지역이었는데 지명은 농경 영향의 지명이 적음은 왜일까?
대청산 : 포두시 청선구 적봉시의 원보산구 송산구-주변 산봉우리의 적홍색에서 영향
오대산은 평창군 홍천군 강릉시에 걸쳐 있고 이름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타난다. 오대산은 백두대간에 속하는 산이며 백두대간이 물길을 중시한 개념이다 보니 생활권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벡두대간의 영향으로 생겨난 행정지명은 없다. 아마도 조선 태종 이후 행정구역 개명이 거의 없었던 탓과 백두대간 개념이 조선 후기 확립되었던 바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또한 청주시에 상당구와 산당산이 있는데 이 두 지명의 선후는 백제 시대 청주의 지명인 상당현上黨縣이 먼저 있었고 상당산이 그 후 나타난다. 땅의 생김새가 주변의 산들로 둘로 싸인 분지형이고 지형이 높아 하늘에 맞닿아있는 형세를 취하여 상당이라 하였다. 상당의 생김새는 중국의 경우와 비슷하여 이름이 나타난 순서는 반대다.
삼국시대 상당은 그 지리적 뛰어난 입지로 인하여 국가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였던 지역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을 빼앗기 위해 치열하게 다퉜다. 백제가 먼저 차지하였고 그 후에 고구려 신라가 관리권 순서이었다.
사진 지도 : 픽사베이 바이두 프렌즈 임업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