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5화)
만주는 오랫동안 우리 겨레가 활동한 지역이었다. 부여·고구려·발해의 터전이었고 근세에 들어서면 병자호란과 조선 멸망 이후 수많은 백성이 끌려가거나 고향을 떠나 서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땅이었다.
이곳의 동쪽에는 장백산맥이 북한과 경계이고 서쪽으로는 몽골고원과 맞닿은 대흥안령산맥이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경계를 이루는 소흥안령산맥이 자리한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발해에 닿는다.
이 지역은 여진족의 청나라가 한족의 중원을 정복한 이후에 중국 영토에 편입되었고 19세기말까지는 청나라 정부에서 여진족 이외는 거주하지 못하게 엄격하게 관리한 지역이었다.
본래 만주라는 말은 여진족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청 태종이 여진부족을 통합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케 하였는데 이 지역에 전체 살던 전체 여진족을 아우르는 용어로 정의하였다. 현대에 들어서 중국 동북 3성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만주지역은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삶을 영위하여 혼이 깃든 곳이며 강토의 근원인 백두산이 있는 땅임에도 이 지역에서 우리말 산 이름이나 지명을 찾기란 쉽지 않다.
특히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라 불릴 만큼 요동 일대에 수많은 산성을 쌓아 중국 세력의 침략을 막아냈다. 안시성의 경우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당태종의 전쟁 패배 이야기가 있을 정도의 유명한 전투지역이었다.
그런 돼도 산의 이름과 행정 지명에 이러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중국식으로 붙여진 산 이름과 행정 지명이다. 특히 러시아와의 접경지인 흑룡강성과 중원 세력의 침입로였던 요령성 지역에 산이름과 지명이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중국 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곳 사람들은 주로 수렵과 유목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정주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산악 지명은 형성 시기가 늦다.”
우리 겨레는 농업위주로 하면서 한 곳에 삶의 터전을 고정시킨 생활방식이었다. 따라서 중국학자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불편하다.
흑룡강성의 흥안령산맥 관련 지명
소흥안령 : 흥안구, 이춘시 대천산현 대흥안령 : 수화시 수릉현, 청강현, 극산현
완달산·송눈평원 일대
계관구(계관산), 마산구(마산), 항산구(황산), 밀산시(밀산), 호림시(호림산), 쌍압산구(쌍압산), 보산구(보산), 첨선구(첨선산), 사방다구(사방대산), 도산구(도산)
길림성의 경우
장백시(장백산 조선족 자치현) 마반석시(마반산)
요령성의 경우
단동시 원보구(원보산), 평산구(평정산) 안산시(마안산), 천선구(천산), 입산구(입산)
요양시 궁장령구(궁안령)
동북 3 성중에서 우리 겨레 활동과 관계 깊은 지역은 길림성과 요령성이고 흑룡상성은 활동이 적은 지역이었다. 우리 겨레의 활동 흔적이 있는 지명을 찾아보면 요령성 지역에는 고구려 산성 명칭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련시의 고려성선산성高麗城山山城와 와방점시의 고려성자산성高麗城子山城이다. 이것도 산에 있는 산성의 유적지 이름이고 행정지명은 아니다.
길림성 지역의 자료를 찾기 위해 검색을 하여보자. 예를 들면 홀산忽山은 단군신화의 아사달 별칭으로 알려진 산이다. 그런데 흑룡강성 하얼빈 일대의 산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처럼 자료를 찾아보면 우리말의 산 이름이나 그 이름으로 만들어진 지명 사례를 찾기 어렵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단순히 시간이 흐르며 지명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재편 과정 속에서 중국식으로 지명이 대체되었기 때문일까? 부여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역사적 변천 속에서 우리말 지명이 소멸된 것일까?
만주는 분명 우리 겨레가 뿌리내리고 활동했던 터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서 우리말 산 이름과 지명을 찾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세월의 흐름 때문이라고 탓을 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하다.
이는 지명과 역사가 어떻게 기록되고 또 누가 그것을 계승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지명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학문적 연구가 아니라 우리 정체성을 찾고 지켜내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