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6화)
왕조시대 수도는 그 나라의 으뜸 도시였다. 정치·문화·경제 등 나라의 모든 면에서 지휘부 역할을 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특별한 신분이나 선택받은 계층이었다. 그래서 지방 사람들에게는 구경 가고 싶고 살고픈 별천지이었다.
이러한 수도를 컨트롤하는 권력자는 왕이었다. 그래서 왕을 신격화하려고 상상세계의 동물인 용을 왕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용’ 글자를 특화하였다. 중국에서는 황제를 천자라 부르며 얼굴을 용안龍顔 덕을 용덕龍德 위계를 용위龍位라 불렀다.
왕이 입는 옷은 용포龍袍 왕이 앉는 의자는 용상龍床 왕이 타는 수레는 용가龍駕 왕이 흘리는 눈물마저 용루龍淚라 표현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나라 왕조에서도 거의 그대로 수용되어 왕과 관련된 의례나 상징성 있는 분야에 ‘용’ 글자를 사용하였다.
중국의 경우
중국 전역에는 용자가 들어간 지명은 수백 개에 달한다. 산의 형상 전설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된 이름들이다. 예를 들어 북경 동북쪽에 노룡현이 있는데 이 현은 연산산맥의 남부 구릉지역에 있다. 지명이 1천 년 이상 변함없이 쓰이고 있으며 기념할 만한 역사문화가 많아 중국당국에서 천년고현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여럿인데 노룡산에서 유래한다거나 노는 흑색을 뜻한데 오행 중 북방의 색인 현색이 흑색이므로 서로 부합한다. 또 노룡요새卢龙塞에서 유래한다고도 하는 데는 조조가 오환을 침략할 때 이 요새에서 출발하였다. 다른 설명은 이곳에 하천 칠수漆水가 있는데 옛날에는 현수玄水라 하였고 현재는 청룡하青龙河라고 하는데 이 강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유래를 보면 용과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이 지역에 한나라 시기 설치된 영평고성永平古城이 있으며 요나라와 금나라 이전에는 노룡도라는 통행로가 있어 만주지역을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북경 시내에도 ‘용’ 글자가 사용된 용골산龍骨山이 있다. 용골은 약재를 생산하는 장소와 관련이 있다. 이 또한 용과 관련이 없다.
북경과 가까운 연산산맥 남부지역에 있는 산들의 영향으로 생긴 지명은 다음과 같다.
북경시 밀운구-운무산(옛 밀운산) 석경산구-석경산 방산구-대방산(옛 대방산)
하북성 당산시-대성산(옛 당산)
한국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도 ‘용’ 관련 지명이 1261개나 확인된다. 전남이 310개로 가장 많고 서울은 9개로 가장 적다. 가장 흔한 이름은 용산龍山으로 전국에 70곳 넘게 분포하며 그 외에 용동 52개 용암 46개 용두 45개소가 있다
서울 용산龍山의 경우 산맥이 북한산-북악산-인왕산-안산으로 이어지다가 약현·만리재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는 산줄기 끝에 해발 90m 정도의 구릉이 있었다. 이곳에 용산이 있었다.
한양 남쪽 교통로 요충지였던 용산은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중요성을 지녔고 조선시대에는 군수물자 집결지였다. 외국 군대들이 용산에 주둔했던 이유는 한양의 목줄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용산은 도시 개발로 사라졌지만 서울시에선 2015년도 경의선 숲길 공원을 만들면서 철로로 끊겼던 부분에 낮은 구릉형태로 복원하여 용산을 이미지화하였다. 용산 지명은 행정구역으로 남아 있다.
용산 지명의 유래는 충숙왕의 왕비인 조국장공주가 용산 일대에 머물다가 왕자를 출산했는데 왕자를 용산원자龍山元子라 불렸다는 바에 기인한다.
서울에 산 이름 관련 직접적으로 관련된 지명은 도봉구가 있다. 도봉구道峰區는 도봉산道峰山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이성계가 개국 전 도를 닦았던 봉이라는 설도 있다.
용은 임금의 전유물이었기에 수도에서 함부로 지명에 붙이면 불경으로 여겨져 대신 궁궐·제단·의례 건축물 장식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지방에서는 왕과 직접 충돌 위험이 적으니 용을 길상吉祥·풍수 상징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했다. 산과 강줄기를 용맥龍脈으로 해석하며 용 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는 왕조시대에는 전 국토가 왕의 땅이라는 ‘왕토’ 개념이 있었고 왕조가 바뀌면 수도도 옮겨졌다. 따라서 특정 왕조의 수도의 지명에 ‘용’을 붙여 왕권의 상징을 고정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을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