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 STAR: 아빠
아내가 첫 아이를 뱄을 때 겉으로 기뻐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다가올 양육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당시도 맞벌이로 그럭저럭 살아가던 때라 아내가 육아에 집중하면 경제적으로 모든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다. 하지만 첫 아이가 태어나 품에 들어왔을 때, 내 고민은 그저 기우였음을 알았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우렁찬 울음을 쏘아대는 생명체를 처음 마주했을 때 양육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감을 잃은 과거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빠다. 내가. 그래, 내가 네 아빠다.
몸이 으스러져도 널 행복하게 해 주마.
싱가포르 여성과 결혼 후, 한국을 떠나기 전 술에 취해 꼬인 목소리로 다짐 비슷한 것을 내게 전한 형님이 있다. 당시는 그저 취중에 하는 가벼운 소리라 여겨 잊고 살았던, 작은 파열음을 타고 넘어왔던 허스키한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난 말이다. 내 아이가,
아빠가 롤모델이라서
아빠처럼 사는 게 목표라 듣고 싶다.”
콩알탄 정도 크기의 손으로 내 손가락을 힘겹게 잡은, 은하계에서 유일하게 나를 닮은 이 생명체를 바라본다. 형님의 다짐처럼 아이의 롤모델이 나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바라는 게 있다면, 이 생명체가 앞으로 만날 세상의 어두운 면을 최대한 늦게 알았으면 한다. 세상의 법칙을 빨리 만나서 아빠의 상황을 이해하는 조숙한 아이로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이가 세상의 부조리로 불편한 습관이 생겨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15] 삶의 방향을 몰라서 슬퍼하지 않았으면 한다. 네가 태어난 이유가 타인이 출제한 세상의 정답을 찾는 행위가 아녀서다. 단순하고 자극적인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서, 천천히 달아올라 어떠한 재미보다 강렬한 온기를 지속하는 독서의 즐거움을 늦게 깨닫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해 담대하게 나아갔으면 한다.
총각 시절에는 아이가 성장할수록 내 존재의 가치는 쇠퇴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커질수록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곁에 있었다. 어쩌면 아이를 가지는 행복보다 더는 꿈을 향해 다가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는지도 모른다. 혼자일 때는 삶의 여정을 조금씩 공유하여 누군가와 함께 걸어간다는 느낌을 알 수 없었다. 또한, 손으로 잡히지도 않는 책임감의 허울로 혼자가 아닌 둘 그리고 셋이 되어가는 과정을 오히려 미련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런가?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해 출산하기까지의 10개월 기간 동안 희망찬 행복을 그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아내에게 미안하다.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나와 작별을 고했다. 아버지로서 살아가려면 나를 버려야 한다고 믿어서다.
하지만
모든 게 기우였다.
아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BCG 매트릭스에서 아빠의 위치가 STAR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이에게 아빠의 역할은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어서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 역할은 시간이 지나면 다음 세대의 주인공에게 양보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전 세대의 역할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다만, 주인공의 역할이 아닐 뿐이다. 조물주가 우리에게 던진 수많은 물음을 혼자서 고민할 때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주인공의 역할을 오랫동안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주인공의 역할을 더는 소화할 수 없다면, 그 순간은 아마도 나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 행복의 종말이지 않을까?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티 없이 맑은 눈으로 나를 보며 방긋 웃는, 누가 보아도 나와 붕어빵인 이 녀석을 보노라면, 그동안 고민했던 모든 걱정은 그저 경험하지 못해 일어난 설익은 거만함이었다. 더는 주인공일 이유가 없었다. 이 아이와 함께 열어갈 세상을 상상하며 꿈꾸는 것만으로도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행복의 충만함이 나를 감쌌다. 이 느낌은 정말 설명하기 어렵다. 혼자서 고민한 모든 몸짓이 내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을 위해서이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나를 잃어간다는 절망감도 없었다. 그래,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 표현하는 게 정확한 것 같았다. 다만 주인공이 아닌 조력자로서, 그리고 그 삶이 더욱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 아이가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옆에서 온몸으로 기뻐하고 아파한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무채색 사회에서 나를 부르는 그 어떤 호칭보다 ‘아빠’라는 호칭이 가장 값지다. 그 호칭이 사라지지 않는 한 쓰러지지도 지치지도 불행하지도 않을 것 같다. 이처럼 완벽하게 STAR와 어울리는 위치가 또 있을까?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오해의 마지막 열쇠로 평생 벽으로 느낀
아버지의 사랑을 열었다.
to be continued....
[15] “아이로 하여금 어떠한 습관에 물들지 않게 하라. 가장 좋은 습관은 어떠한 습관에도 물들지 않는 습관이다.” (출처: 장 자크 루소,『에밀』, 이환 옮김, 돋을새김, 2015, p70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다음 주는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