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우현아, 여기는 승기
승기야, 여기는 우현이
서로 인사해.
승기는 사회에서 만난 친구고
우현이는 대학 동기야.”
1. 어색하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셋을 감싸는 공기마저 무겁다. 평소에 귀가 아플 정도로 재잘거리는 우현이조차 말이 없다. 승기의 매서운 눈초리에 주눅이 들었나? 그럴 녀석은 아니다. 우현이가 말이 없을 때는 감성적 상상력의 찌릿함을 느끼지 못할 때다. 왁스로 떡칠해 한껏 멋 부린 우현이 머리, 반경 5m 이내에 있는 모든 여자에게 강한 수컷의 신호를 전달하는 지독한 페로몬 향, 하얀 셔츠와 재킷, 그리고 9부 코튼 팬츠와 로퍼 구두로 완성한 댄디룩. 네 복장을 보니까 알겠다. 소개팅 나왔냐?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여자라 생각한 것 같다. 결혼한 지 3년이나 지났는데, 개 버릇 남 못 준다. 우현이는 서울 여자와는 연이 없었다. 결국, 자기 고향 사람과 결혼했다. 수컷에게는 자신의 향기를 내뿜을 수 없다던 자칭 페미니즘의 끝판왕 우현이. 나름 귀여운 천벌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우현이는 자신의 향기를 전혀 내뿜을 수 없는 남자만 득실대는 업종에서 제품을 파는 영업사원이 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감성적 상상력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신세인 게냐.
2. 우현이의 겉으로 보이는 서글서글한 모습과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남자 선후배 사이에서 평판이 좋다. 우현이는 평소에 자기 이야기를 거의 안 한다. 그런데도 손쉽게 다른 사람의 깊은 이야기까지 꺼내는 놀라운 대화 능력을 지녔다. 그 능력을 남자한테 쓸 때는 어디에도 없는 훌륭한 책사[41]다. 학창 시절, 남자들 사이에서 우현이를 ‘우갈량’이라 불렀다. 잠시 당시를 회상하자.
“우현이 형, 고민이 있는데요, 여자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를 대하는 게 예전과 달라졌다고 불평을 해요.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만날 때마다 그 소리를 해대니까 결국 다투고 말았어요. 저 진짜 변한 것 하나도 없이 똑같이 좋아하고 있어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3. 우현이의 얼굴을 보니 별거 아니라는 표정이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며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깔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연애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시련이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고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생각한 후 여자 친구를 설득하려 해. 감성적으로 덤비는 동물에게 감성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정말 미련한 짓이야. 이성적으로 대처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시련이라고? 나 같은 모태솔로는 후배가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우현이가 달라 보인다. 우현이가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를 오마주로 말을 이어간다.
“여자 친구의 문제가 아니라고, 잘 생각해봐. 변한 게 없는데도 여자 친구는 계속 네가 변했다고 말한다면 범인은 바로 너야.”
4. 손가락으로 후배를 가리키며 위풍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멋지다. 그렇군. 후배 녀석이 잘못했군. 그런데 뭘 잘못했다는 거지? 알쏭달쏭하다. 후배도 나와 같은 마음이다. 잠시 뜸을 들이다 우리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어간다.
“예를 들어서, 네가 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났어. 어떻게 할 거야? 다가가, 온갖 감언이설로 그녀를 유혹하겠지. 안 그래? 그렇다고 그녀가 그리 쉽게 관심을 보일까? 네가 너무 좋다고 덥석 전화번호를 알려줄까?”
“아닙니다.”
“그래, 당연히 아니지. 상대방을 외모로 홀릴 만큼 우리는 잘생기지 않았어. 그렇다고, 한번 거절했다고 포기할 거야? 그건 남자가 아니지. 그 느낌은 알잖아. 상대방이 정말 싫어하는지 아닌지는. 이성의 얼굴만 봐도 보이니까.”
5. 후배가 고개를 끄덕인다. 후배의 눈빛에서 우현이에 대한 무한신뢰를 엿본다. 우현이가 이리 이성적인 놈이었나? 나와 있을 때와는 딴판이다. 그나저나 너희 둘은 이성의 얼굴만 보아도 너희를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고? 나도 좀 가르쳐주라.
“각설하고, 결국, 마음에 드는 이성의 연락처를 얻었다고 가정하자. 잘 생각해봐. 연락처 받으면 바로 사귀나? 연락처 받으면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 건가?”
“흠… 아닙니다. 먼저 썸부터 타겠죠. 그러다가 썸으로 끝나거나 사귀거나...”
그렇군, 연애에도 단계가 있구나. 둘 대화에 낄 수 없는 내 모습이 참 처량하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이기에 숨죽이며 청취자 모드 중이다.
“그래, 잘 알고 있네. 사귀기 전에, 썸이라는 단계가 있어. 우린 당장 진도를 빼고 싶지만, 여자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생물은 아니라고. 전화번호 하나 받았다고 기뻐서 동네방네 떠벌리는 유치한 남자들과 차원이 다르다고. 수제자라면 이미 이 정도는 알고 있을 것 아니냐.”
“네, 선생님”
to be continued...
[41] 책사(策士): 책략을 잘 쓰는 사람. 계책에 능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