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9. 문 앞에 쌓인 지로용지 더미가 눈에 처음으로 띈다. 각종 광고 전단이 출입문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오랫동안 영업을 하지 않은 것 같다. 틈틈이 업자와 통화를 해야 했을까? 사실, 부동산 중개업자와 다시 통화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정말 없지 않은가? 이사한 후 중개료를 업자에게 보내면 그것으로 만남은 종료다. 집주인은 해외에 있어서 통화하기 힘들다. 계약서에 적힌 집주인 자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순간도 기대하기 싫은 익숙한 목소리를 또 듣는다. 어쩌면 전화번호를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스마트 폰으로 찍은 계약서 사진을 확대해 확인했다. 번호를 잘못 누르지는 않았다. 중개업자 번호로 전화해도, 집주인 자녀 번호로 전화해도, 어떻게 같은 여자가 전화를 받을까? 도깨비에게 홀린 건가?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요청으로 당분간 착신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몇 번을 전화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내 전화기의 문제일 수도 있다. 효상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승기야, 이 시간에 전화를? 왜?”
“아니야,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너도 잘하려고 그런 것 안다고.”
“갑자기 무슨 소리냐? 뜬금없이?”
“끊는다.”
10. 전화기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답답한 속을 풀어줄 커피믹스 한 잔을 상상하며 이곳까지 한숨에 달려왔다. 숨이 차다. 빠르게 뛰어서 그런지 심장도 요동친다.[114] 심장이 뛰는 소리가 커 주위 사람에게 들릴 정도다. 귀가 멍해지면서 주위가 고요해진다. 누군가 강제로 음소거를 했나? 다리에 힘이 빠지며 후들거린다. 아직도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냥 이해하고 싶지 않다. 자꾸 한 단어만 머릿속에 맴돈다. 언어의 생성을 관장하는 언어중추가 버퍼링으로 훼손되었다.
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사기.
11. 근처 카페로 왔다. 잠시 숨을 고를 필요가 있어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정신 차리자. 도대체 무엇을 놓친 건가? 내용증명을 다시 펼쳐봤다. 아내가 내용증명을 볼지도 몰라서 항상 몸에 지니고 있다. 더는 아내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내용증명에 집주인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혀있다. 임대차 계약서와 비교하니 집주인 전화번호와 주소가 다르다. 심지어 집주인은 해외에 거주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을 마주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막스 베버의 ‘균형적 현실감각’[115]을 발휘할 때이다. 냉정해져야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 해프닝이라고, 별일 아니라고, 수백 번 대뇌이며 여기까지 왔지만 모든 상황은 내가 사기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내용증명이 사실이더라도 아직 쫓겨난 게 아니다.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마신 후 내용증명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간다. 누군가 받았다.
“여보세요”
“○○○ 씨 되시나요?”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얼마 전 내용증명을 받은 세입자 김승기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내용증명에 문제가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김승기 씨, 드디어 통화하네요. 월세를 제때 보냈으면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었을 텐데요. 중개업자가 계약하면서 혹시라도 월세가 밀리면 바로 이야기하라고 해서 이상하다 싶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월세가 첫 달 이후부터 밀리더군요. 그래서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월세를 내지 않는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어요. 그때마다 중개업자가 세입자가 사정이 있어서 그렇다고 보증금으로 월세를 제하라고 해서 참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부동산 업자가 연락되지 않아서 내용증명을 보냈습니다.”
“저희는 월세로 계약한 게 아니라 전세로 계약했습니다. 집주인분께서 해외에 거주한다고 해서 부동산에서 대리로 계약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집주인을 대신해 집주인 자녀분 하고 통화도 했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요? 저희는 자녀가 없습니다. 그리고 해외에 거주한 적도 없고요. 주소를 보면 알겠지만,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서울에 집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요. 집을 내놓으려 중개소에 찾아갔는데, 중개사가 이 집은 팔면 손해라고, 자기가 대리해서 월세 계약을 책임지겠다고, 일종의 연금이라 생각하라고. 그나저나 전세 계약이요?”
“네, 전세보증금 사억 원에 계약했습니다. 너무나 난감합니다.”
“아무래도 경찰서에 신고하는 게 좋겠어요. 전세 사기당한 것 같네요. 어쩐지 업자와 연락이 안 되더라니, 저는 월세 계약을 했습니다. 너무나 찝찝합니다. 제 물권을 범죄로 사용하다니, 김승기 씨 사정은 딱하지만 제가 도와줄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내용증명의 내용대로 진행할 생각이니까, 월세를 내든지 경찰서에 신고해 사기꾼을 하루빨리 잡으세요. 그리고 저한테 전화해 사정 이야기 마시고요. 저도 피해자입니다. 그래요, 당분간은 이천만 원 보증금에서 월세를 제할게요. 그 정도면 최대한 편의를 봐준 거예요.”
“감사합니다.”
12. 감사하다니? 무엇이? 사억 원을 날리게 생긴 이 순간에? 사실을 마주하니 감당할 자신이 없다. 완벽하게 당했다. 그래도 당분간은 남은 보증금으로 월세를 제해준다는 집주인의 배려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배려라고 하기도 어렵다. 어차피 보증금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5개월 남짓이다. 일단, 경찰서에 신고하는 게 먼저다.
“어떻게 오셨나요?”
“아무래도, 전세 사기를 당한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13. 경찰서 방문은 살면서 처음이다. 담당 형사를 만나려고 대기 중이다. 속이 더부룩하고 쓰리다. 복부 팽만감도 느껴진다. 긴장하면, 윗배가 팽창해 갈비뼈를 짓누르는 고통을 자주 겪는다. 풍선에 바람을 가득 넣어 터지기 일보 직전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우현은 체중 관리 좀 하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한다. 기능성 소화 장애로 일어난 현상이라 몇 번이나 말해도 믿지 않는 눈치다. 하긴, 주위 동료도 불룩해진 배를 보고 살찐 것 같다고 한다. 그래, 차라리 체중이 늘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긴장한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긴장할 때마다 배가 불룩해진다는 사실을 우현이 알면 얼마나 날 놀릴지 상상이 간다. 사람들은 내가 긴장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상황을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감정적이다.
그리고 자주 긴장한다.
복부의 팽창으로 인한 고통은
나만 알고 있는 긴장의 흔적이다.
14. 하지만 긴장은 복부 팽창을 발생하는 도화선이지 직접적 원인이라 말하기 어렵다. 원인은 몸에 받지 않는 음식을 먹어서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안 먹고살 수 있겠는가? 먹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밀가루 음식 때문이다. 그게 날 망치고 있다. 밀가루를 끊어야 한다. 이처럼 생각하면 뭐하나? 조금 전에도 밀가루 음식을 먹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밀가루 음식을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매일 밀가루 음식을 먹는다. 밀가루 음식을 너무나 좋아한다. 신은 밀가루 음식과 긴장을 섞어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몹쓸 몸뚱이를 주셨다. 그런데도 난 밀가루 음식을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미각중독[116]에 빠졌다. 뇌와 몸이 따로 노는 몹쓸 저주에 걸린 게 분명하다. 뇌는 몸을 걱정하지 않는다. 쾌락 중추에서 뿜어 나오는 도파민을 맛보려는 뇌는 밀가루 음식을 끊임없이 먹으라고 강요한다. 도파민 분비로 인간은 행복함을 느낀다. 음식 섭취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이나 상상으로도 도파민을 분비한다. 가령, 영화나 드라마에서 감동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상상하거나, 속상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글을 읽거나, 무언가에 열중하거나, 목표를 달성했을 때다. 도파민 분비가 적으면 인간은 우울증에 빠진다. 반대로 도파민 분비가 과다하면 조현병에 이를 수 있다.[117] 몸의 거부반응에도 도파민 분비를 위해 밀가루 음식을 먹는 몹쓸 짓을 반복한다.
도파민이 행복을 관장한다면,
미각중독은 행복하지 않기에 일어나는 현상인가?
행복했다면 미각중독으로
밀가루 음식을 먹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소화불량도 없었겠지.
소화불량은 몸을 인질로
행복하지 않다고 외치는
뇌의 긴장인가?
그래,
난 지금 행복하지 않다.
밀가루여! 부탁이니,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다오.
다 꿈이라 말해다오.
제발.
To be continued....
[114] 요동치다: 심하게 흔들리거나 움직이다.
[115] “균형적 현실감각이란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사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이자,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는 능력을 말한다.”
[출처: 막스 베버,『소명으로서의 정치』, 박상훈 옮김, 후마니타스, 2021, p93]
[116] 미각중독이란 우리 몸이 특정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았던 느낌을 기억했다가 그 맛만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그 맛만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단맛, 짠맛, 매운맛을 느꼈을 때 활성화되는 뇌의 특정 부위는 마약을 투약하거나 담배를 피울 때 반응하는 부위와 동일하다. 즉 중독성과 내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미 특정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더욱 강력한 자극을 필요로 하고 이는 과잉섭취를 유발하게 된다.
[출처: 이현정, 『달고·짜고·매운 음식만 찾는다면…'미각 중독' 의심해야』, 헬스조선, 2016.08.19.,
https://m.health.chosun.com/article/article.html?contid=2016081901410
[117] 이해나, 『도파민 역할… 부족하면 생기는 중증 질병은?』, 헬스조선, 2014.01.15.,
https://m.health.chosun.com/svc/news_view.html?contid=201401150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