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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7: # 흑화 1화

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by 카테난조


Episode 7:

# 흑화 1화




1. 승기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왼쪽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다. 하지만 담배는 더는 없다. 땅바닥에 떨어진 장초를 찾아 다시 불을 붙인다. 승기는 담배를 끊은 지 20년이 넘었다. 무엇이 승기를 그렇게 힘들게 한 건가? 승기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평범한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나 평범해서 믿을 수 없다. 이미 충분히 놀랐다. 카랑카랑하고 짱짱하게 보였던 승기가 이리도 외롭게 살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냉철한 이성을 자랑하는 승기도 감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렇게나 감정적인 사람이었던가? 조금은 실망스럽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승기는 끝까지 로봇이기를 바랐다.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다. 그 감정을 들키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아직 승기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승기야, 이렇게 외롭고 힘들었는데, 평소에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 섭섭하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이사한 지 벌써 10개월이나 됐어? 더는 숨기지 마. 응?”


“효상아, 내용증명을 받다니....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게 말이다, 그게....”





2. 승기의 손이 떨린다. 입술도 파랗다. 다른 사람한테는 일어날 법한 일이 승기에게 일어나서다. 승기조차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땅바닥에 떨어진 꽁초의 연기라서 그럴까? 가로등 불빛의 조명에 갇혀 균형을 잃은 담배 연기가 현재 승기의 처지를 대변한다.



그렇게 승기는 대화의 물꼬를 다시 텄다.




3. 내용증명? 내게? 누구지? 발신인[108] 이름을 보니 집주인이다. 집주인이 왜?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내용증명이 좋은 내용일 리가 없지 않은가? 서둘러 뜯어보았다.



1. 본인은 대박 부동산에 대하여 보증금 이천만 원에 월 임대료 이백만 원에 임대차기간을 2022.05.30.부터 1년간으로 하는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2. 수신인은 2022.07월분부터 3기 이상의 임대료 연체로 본 내용증명을 통하여 신속한 지급을 촉구합니다.


3. 귀하께서 신속히 차임 지급요청을 거부하면 본인은 계약 해지를 통보한 후 관련한 법적 조치를 이행할 예정입니다.





4. 잘못 읽었나? 임대료 연체? 보증금 이천만 원? 임대료 이백만 원? 도대체 내용증명에 쓰인 글씨가 한글인가? 읽어도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이성은 정신을 붙잡고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라고 지시한다. 머리를 한방 쥐어박았다. 그리고 뺨을 올려붙였다. 마음이 안정된 듯하다. 내용증명을 꼼꼼히 다시 읽었다. 아무래도 집주인이 다른 세입자와 착각한 게 분명하다. 월세 계약이라니? 난 전세 계약을 했는데? 분명히 착각한 게 틀림없다. 별일 아니다. 그래, 별일 아니다. 부동산에 전화하면 해결될 간단한 문제이다. 어랏? 몸이 이상하다. 현기증으로 초점은 흔들린다. 눈앞에 놓인 모든 사물이 흐릿하게 보인다. 어지럽다. 주위가 빙빙 돌아간다. 속도 울렁거린다. 다리에 힘도 풀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의자에 잠시 몸을 의지했다. 몸은 이미 반응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Bodies never lie. -Agnes de Mille-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그네스 드 밀-





5. 아내에게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다. 당분간 내용증명은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다. 부동산에 전화하면 해결될 일이다.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없다. 부동산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한 시간 후 다시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오후 7시다.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한 것 같다. 내일 아침에 다시 전화해야겠다. 조금은 불안했다. 하지만 별일 아니다. 스마트 폰으로 나와 비슷한 상황이 있는지 검색했다.



“내용증명이 잘못 날라온 경우”

“내용증명이 문제가 있을 때”

“내용증명이 잘못되었을 때”





6. 아무리 찾아도 수신인을 착각해 내용증명을 보낸 사례를 찾을 수 없다. 비슷한 피해를 겪은 사람이 이토록 없단 말인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가? 내용증명은 법적 효력이 없다고 한다. 무슨 소리인가? 내 경우는 다르다. 법적 효력을 다툴 이유조차 없다. 그나저나 집주인에게 바로 전화해 항의하려고 했는데, 그러지 말라고 한다. 법적 소송에 휘말리면 불리한 진술을 녹취당할 수 있어서다. 오히려 검색한 게 실수다.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정말로 수신인을 착각해 보낸 경우가 없을까? 불안하다. 불안해 미치겠다. 그래, 일단 사실 확인부터가 먼저다. 내일 아침에 부동산에 통화 후 다음을 생각하자.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요청으로 당분간 착신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7. 부동산 중개업자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몇 번을 해도 수화기 너머로 친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나를 불안하게 한다. 전화번호가 바뀔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굳이 애써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갈 이유는 없다. 엄마가 보고 싶다. 유년 시절, 오락실을 포기하고 엄마 손을 붙잡고 교회에 끌려갔다. 목사님은 정말로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덤블도어 교수였다. 어찌 그리 내 마음을 아는지, 때로는 너무나 뜨끔해 무섭기까지 했다. 목사님 설교가 떠오른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리라.[109]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110]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111]


‘다시는 주일에 오락실 가지 않을게요.’





8. 그래, 이곳은 지옥일 리가 없다. 나의 기우[112]일 뿐이다. 아무래도 반차[113]를 써 부동산에 직접 가야겠다. 그래, 모든 게 내 기우일 뿐이다. 버스 안에서 중개업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더는 이 번호를 누구도 수신하지 않는다. 제품을 판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구매를 위한 사후관리가 또한 중요하다. 고객은 돌고 돌아서다. 그런데도 고객과 상의 없이 전화번호를 바꾸다니... 무례하다. 이런 식으로 영업하면 고객의 신뢰를 잃는다. 어쨌든 어려운 상황에 날 도와준 업자다. 이따가 도착하면 따뜻하게 한마디 해야겠다. 아무 일도 아니다. 단지 사소한 오해로 일어난 해프닝이다. 사람은 얼굴에 살아온 발자취가 쓰여 있다고 한다. 이마의 짙은 주름과 각진 눈썹으로 연륜과 다부짐을 느낄 수 있는 중개업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시원스러운 너털웃음을 지닌 그는 누가 보아도 신뢰감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래, 전화번호를 바꾼 이유가 있겠지. 버스가 너무나 느리다. 차가 막히지도 않는데 이리로 거북이처럼 움직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따라 정류장마다 정차하는 시간이 길다. 아니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오늘따라 꺼지지 않는다. 부동산에 도착하면 중개업자는 사소한 오해라 말하며 커피믹스를 내게 타 줄 거다. 달곰한 커피가 너무나 마시고 싶다. 기사님, 제발 속도 좀 내주세요. 급합니다. 급하다고요.



부동산 문은 굳게 닫혔다.

내 마음도 굳게 닫혔다.



to be continued....





[108] 발신인(發信人): 소식이나 우편, 전신 따위를 보낸 사람. 발신자.

[109] 대한성서공회, 『개역개정 뱁티스트 성경전서』,(주)한일문화사, 2016, 마가복음 9장 43절

[110] 대한성서공회, 『개역개정 뱁티스트 성경전서』,(주)한일문화사, 2016, 마가복음 9장 45절

[111] 대한성서공회, 『개역개정 뱁티스트 성경전서』,(주)한일문화사, 2016, 마가복음 9장 47절

[112] 기우(杞憂): 쓸데없는 걱정

[113] 오전이나 오후 동안 주어지는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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