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62. 나머지 잔금을 치른 후 새 둥지로 이주했다. 벌써 5개월이 지났다. 보통 이사하면 우현과 효상이를 불러서 집들이를 한다. 꼭 집들이가 아니더라도 특별한 날이면 우현과 효상이를 불러서 축하하는 게 우리 집의 문화라면 문화다. 아내가 우현과 효상이를 싫어하지 않는 눈치다. 이게 참 나로서는 신기한 노릇이다. 다른 동료는 다양한 이유로 탐탁지 않아한다. 그 다양한 이유를 우현과 효상이만 피해 간다. 정말로 이상한 현상이지만 딱히 설명할 길은 없다. 아내는 우현과 효상이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 워낙 친해서 그런가? 그 이유가 무엇이든,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술을 먹고 싶을 때는 효상이와 우현을 초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효상이와 우현에게 아무 말하지 않았다. 전입신고도 못 하는 상황이고 이중 계약서를 쓴 상태라, 이런 상황을 우현과 효상이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 술만 들어가면 삼킬 말은 내뱉고, 내뱉고 싶은 말을 삼키는 청개구리 술버릇도 한몫한다.
63. 나도 안다. 주위 사람이 뒤에서 나를 ‘두리안’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리안의 역한 냄새를 나도 싫어한다. 효상이가 몇 번 권하기는 했다. 역함 냄새를 참으며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과일의 왕이라고 불리는 두리안의 맛을 아직도 모른다. 도대체 나를 왜 두리안이라고 부를까? 분명히 칭찬은 아니다. 눈치 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해서? 솔직히 억울하다. 누구보다 상대방의 눈치를 본다. 상대방을 배려해 말하는 게 정확한 팩트다. 우현은 워낙 열린 마음으로 상황을 바라보는지라 내 말투에 대해서 언질[103]을 준 적이 없다. 효상이는 다르다. 말투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몇 번이나 걱정스럽게 언질 줬다. 탁자에 놓인 스투키처럼 조용하게 살고 싶다는 효상이가 가끔 단호히 내 말투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적잖게 놀란다.
64. 사회에서 만난 친구라지만 효상이는 동생이다. 너무 꼰대 같은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마음을 몰라주는 효상이에게 기분이 나쁠 때도 있다. 형한테 건방지게 떠들지 말라고 호통을 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효상이까지 잃으면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다. 우현은 효상이에게 딸려온 덤 같은 친구다. 그런 인간들 있지 않은가?
가난하지도 않으면서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부자를 싫어하면서
간절히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싸구려 자존심을 지키려고
상대방의 장점을 보지 않고,
항상 쿨한 척하지만,
질투로 가득한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정체성도 없으면서
허구한 날 트렌드 타령이나 하고,
어설프게 책 몇 권 읽고
세상을 다 아는 척 까불고,
매스 미디어에서 떠드는 잡소리를
자기의 의견인 양 떠들어대고,
상황에 따라서
좋아하는 게 싫어지거나
싫어하는 게 좋아지고,
성공의 기준을
재산의 유무로 파악하는
그런 유형의 인간.
그게 딱 우현의 유형이다. 그런 친구가 어떻게 효상이 옆에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우현은 사람이 전부인 척하는 전형적인 내로남불형[104] 인간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난 우현을 혐오한다.
65. 물론 한 번도 속내를 우현과 효상이에게 보여준 적은 없다. 효상이 때문이다. 그래서 좀 억울하다. 두리안으로 뒤에서 불리며 폭탄 취급당하는 게 억울하다. 싫어하는 대부분 상황을 참기에 그렇다. 정말 많이 참는다. 하고 싶은 말 중 백 분의 일도 안 한다. 직설적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더군다나 행동과 말투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조차 안 한다. 그런데도 두리안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직설적으로 말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사람과 대화할 때 기준은 있다. 그게 다른 이와는 다르다. 말을 꺼내기 전에 대화의 주체를 선택한다. 예를 들면, 효상이와 대화한다고 효상이를 항상 대화의 주체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B(효상)와 대화하지만 실제로는 C(우현)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 C(우현)가 상처받을까, 이해 못 할까 봐 조심스럽게 우회적으로 전하는 방식. 다들 이런 경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C(우현)가 싫다고 함부로 대하면 B(효상)에게도 함부로 대한다고 믿어서다. 물론, C(우현)는 여전히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다. 처음에는 이런 부분이 참 답답했다. 아무리 말해도 모르니까 말이다.
직접 말해야 할까?
그것은 싫다.
내키지 않는다.
가족이 아니라면
감정을 소비하면서
대화를 섞고 싶지 않다.
선을 넘으면
나도 참기 힘들어.
66. 감정을 소비해 대화하는 게 나로서는 힘들다. 효상이를 만나기 전, 누구보다 감정을 소비해 지인의 최선을 생각했다.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인간관계에 참여했다. 최선이라는 단어를 적어도 입으로 내뱉으려면, 적어도 공감을 넘어서 가고자 하는 방향이 바른 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믿는다.
인생의 방향은 정답이 없다고
많은 이가 말한다.
인생의 방향은 다름만 존재한다고
많은 이가 말한다.
이게 무슨 귀신 싯나락 까먹는 소리[105]인가?
정답은 없고 다름만 존재한다면,
모든 결과는 요행[106]에 불과하다.
결과의 과정 자체가 없어서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이루어진 희로애락[107]이 뜻밖에 얻는 행운이라는 말인가? 발자취는 분명히 있는데, 그것을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행운의 반대말은 불운이다. 행운과 불운은 과정이 없을 때만 일어난다. 과정이 있다면, 이는 성공과 실패로 불려야 한다. 정당하게 노력해서 얻는 대가이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사람은 행운과 불운으로
인생의 결과를 논하려 한다.
하루살이 인생이다.
난 빠지련다.
밖에서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린다.
“안효상 씨 계십니까?”
잘못 들었나? 효상이를 왜 여기서 찾지? 이제 귀까지 이상하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우체국입니다. 본인이세요? 내용증명입니다. 여기에 서명하세요.”
to be continued...
[103] 언질: 나중에 꼬투리나 증거가 될 말. 또는 앞으로 어찌할 것이라는 말
[104]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으로, 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때는 합리화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 [출처:네이버 국어사전]
[105] 분명하지 아니하게 우물우물 말하는 소리를 비유적으로 이를 때 쓰거나, 조용하게 몇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비꼬는 경우, 또는 이치에 닿지 않는 엉뚱하고 쓸데없는 말을 이를 때 쓰는 속담 [출처: 국립국어원]
[106] 요행(僚倖): 우연히 이루어져 다행인 것, 뜻밖에 얻는 행운
[107] 희로애락 (喜怒哀樂):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