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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 # 트리거 11화

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by 카테난조




Episode 6:

# 트리거 11화





51. 아내와 상의 없이 자전거를 구매했다. 외적으로 아내와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다는 고상한 핑계였다. 사실, 자전거를 구매한 이유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공간의 투쟁이다. 특히, 공간의 경계는 내게 중요하다. 공간 안에 무엇이 놓였느냐에 따라서 역할을 달리한다. 거실 벽면에 설치한, 큰마음먹고 구매한 검은색 와이드 뷰 4K UHD TV를 즐기는 아내에게 거실은 영화관이다. 갈색 천연 면피로 제작해 우월한 착석감을 느낄 수 있는, 벽걸이 TV 맞은편에 있는 4인용 소가죽 소파에 누워 단잠을 즐기는 내게 거실은 침실이다. 거실 베란다 쪽은 아이들 안전을 고려해 미끄럼 방지 계단과 모서리를 라운드 처리한 분홍색 미끄럼틀을 즐기는 둘째 녀석에게 거실은 놀이터다. 벽걸이 TV와 소파 사이에 놓인 두께가 있는데도 섬세한 곡선 처리가 일품인 흰색 월넛목 테이블에 문제집을 펼쳐 놓고 공부하는 첫째 녀석에게 거실은 공부방이다.



물건과 사람에 따라서

같은 공간의

쓰임은 다르다.





52. 이처럼 눈을 감고도 물건의 위치를 꿰뚫고 있는 거실 공간이 정전으로 경계가 사라진 적이 있었다. 눈을 감고도 물건의 위치를 파악해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몇 발자국을 떼자마자 월넛목 테이블에 정강이를 부딪쳐 한 다리로 껑충껑충 뛰다가 첫째 아이 필통을 발로 밟았다. 정강이와 발바닥의 아픔보다 정전으로 어색해진 거실 바닥에 넘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이제는 거실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도 거실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도 혼란스러웠다. 넘어지려는 찰나에 반사 신경으로 손을 뻗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무언가를 잡았다. 잡지 말아야 했었다. 아직 할부도 끝나지 않은 벽걸이 TV는 나와 함께 그대로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정전으로 익숙한 모든 경계가 무너졌다. 정강이 통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욱신거린다. 다리가 뻣뻣한 느낌이다. 부러진 건가? 발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움직인다. 감각도 살아있다. 골절은 아닌듯하다. 모든 조건은 그대로인데, 빛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처음 느끼는 쓸쓸함과 외로움은 익숙한 공간을 채워간다. 그렇게 어둑한 공간에 부서진 TV를 벗 삼아 한동안 누워있었다. 의지와 무관한 콧노래를 시작한다. 의지와 무관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원인을 정강이 통증이라 애써 외면했다. 콧노래를 듣고 있는 귀가 흠칫 놀랐다. 잊고 있던 멜로디여서다. 조용필 선생님이 부른 ‘바람의 노래’였다. 애써 누른 감정이 터졌다. 울음이 멈추지 않는다. 팍팍한 삶을 위로받고 싶었나 보다.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나 좀 봐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나 보다.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 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89]


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53. 어두고 깊은 수렁의 끝에, 나를 모른 척했던 내가 서 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선생으로서 살아가는 타인을 위한 인격체가 아닌 올곧은 내가 그곳에 서 있다. 물리적으로 눈의 기능을 사라지게 하니 비로소 나를 만날 수 있다. 오히려 비교할 게 사라지니 마음이 편하다. 그래, 이런 공간을 항상 원했다. 올곧이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사적인 장소. 거실에 불이 들어왔다. 거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첫째 아이의 필통은 심하게 찌그러져 있고 벽걸이 TV의 액정 패널은 심하게 파손되었다. 정강이는 심하게 부어올랐지만, 골절은 아닌듯하다. 불이 들어오니 다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뿐이다. 베란다 창문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거실을 치우는 나를 만난다. 어느새 이렇게나 늙었던가? 배는 왜 이렇게 나왔는데? 창문에 비친 희미한 모습에도 한눈에 주변머리가 없어 보인다. 주변머리가 이렇게나 사라졌든가? 사라진 머리카락만큼 소갈머리[90]가 없는 사람이 되어 간다. 학원을 마치고 귀가한 첫째 아이는 찌그러진 필통을 부여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아내가 너무 애지중지[91] 키웠다. 아버지가 다친 게 눈에 보이지 않느냐? 그깟 필통이 뭐라고? 자기 물건부터 눈에 들어오는 이 녀석은 따끔하게 혼나야 한다. 내가 물건보다 못한 존재란 말인가? 서러운 감정이 복받치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다.



“왜? 내가 그리도 못마땅하냐?

네 놈도 너와 똑 닮은 놈을 낳아 키우면

그때는 이 아비를 이해할 거다. 못난 놈.”





54. 아내가 들어왔다. 이 시간까지 무엇을 한지 알 수 없는 아내다. 요즘 유독 외출이 잦다. 요즘 유독 짜증 섞인 목소리로 화를 잘 낸다. 물어보기도 겁난다. 아내는 엉망이 된 거실과 내 몰골[92]을 번갈아 본 후 한심한 듯 고개를 저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정강이가 너무 부어올라 움직이지도 못하겠는데, 엄청난 굉음[93]에 놀라서 잠에서 깬 둘째를 업고, 아수라장으로 변한 거실을 혼자서 힘겹게 치우는 배불뚝이 대머리 아저씨가 되니까 알겠다.



아버지는 항상 외로웠다.

지금의 나처럼.

살아계실 때

아버지에게 한 번쯤은 물었어야 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아버지, 힘들지 않으세요?”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94]




55. 정전사건 이후로 공간의 위로라 믿었던 집이 낯설다. 올곧이 나를 만날 수 있는 진심의 공간이 필요하다.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탁 트인 강턱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나를 부른다.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눈치 보지 않고 숨을 쉬고 싶다. 그게 어디든 집보다는 편하지 않을까? 주변머리가 없는 배불뚝이 아저씨가 하나둘 보인다. 삼삼오오 모여있다. 이들도 나처럼 집이 불편했을까? 그 공간에 들어가 그들 중 하나로 비치고 싶지는 않았다. 멀리서 보아도 그들의 모습은 볼품이 없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애써 위로한다. 참 모순적인 삶이다. 안 그런가? 그래도 그들 중 하나로 비치고 싶지는 않다. 확증편향 놀이에 푹 빠진 내 옆을 무언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 물체를 한동안 바라본다. 자전거다. 공간은 그동안 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공간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내가 움직여 원하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아니다, 공간도 움직일 수 있다. 생각해 보니까 공간의 위로와 진심의 공간을 동시에 만족하게 하는 물건이 있다. 자동차가 그렇다. 그 어떤 새로운 곳도 자동차 안이라면 나만의 공간이다. 그리고 지금 바라보는 자전거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한다. 더군다나 하체를 단련하는 운동 기능까지 있다. 다음날 약 30만 원 상당의 자전거를 아내와 상의 없이 구매했다.



아내에게 일 년 치 욕을 한꺼번에 먹었다.

다음날 바로 환불했다.

자전거를 구매한 일이 이렇게 욕먹을 일인가?

30만 원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95]





56. 그래서 난 아내의 삼천만 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차라리 그동안 빠듯한 살림에 생활비를 조금씩 떼어 모은 돈이라면 미안한 마음에 절이라도 할 판이다. 자전거를 샀다고 생각 없이 사는 남편으로 나를 몰아갔다. 고작 30만 원이었다. 그리고 그 소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소비한 돈이었다. 나를 위해 그 정도도 쓰지 못하는가? 더군다나, 서울로 이사 갈 때조차 삼천만 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당시에 서울로 이사하기에는 자금이 넉넉지 않았다. 그리고 프리랜서 강사였기에 신용도 좋지 않았다. 이자율이 낮은 은행을 찾으러 수많은 험지[96]를 누비며 고생한 것을 뻔히 알았으면서도, 자그마치 15년을, 15년 동안 말하지 않은 숨겨진 돈이라니, 무슨 생각이었을까? 비자금 한 푼 모으지 못한 채 아내에게 월급 모두를 건넨 자신이 초라한 오늘이다.



“이렇게 큰돈을? 당신 때문에 힘이 된다. 고마워.”





57. 화가 나는 것과 별개다.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내는 분명히 뜻밖의 선물을 주었다. 남은 오백만 원 정도는 우현과 효상이에게 빌리면 된다. 주인집에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게 어디인가? 분명히 고마워해야 하는데 고맙지가 않다. 배신한 게 아닌데도 배신당한 기분이다. 공중화장실에서 옆 칸에 있는 사람에게 휴지를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면지[97]를 건네받은 상황이다. 분명히 고마운데, 찝찝하며 놀림당한 기분. 그래 이 기분이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사람은 참 간사한 동물이 아닌가? 아내가 통장을 무심하게 방바닥에 툭 던지기 전까지, 그동안의 잘못을 깨닫고 그녀를 다시 사랑하기로 다짐했던 터다. 우현과 효상이가 이런 나를 보면 얼마나 비웃을까? 우현과 효상이 앞에서는 누구보다 비평적이고 계산적이며 냉철한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사실 이렇게나 감정적인 찐따[98]다.



시간과 공간의 뒤틀림을 견디지 못해

다른 인생을 선택하는 수많은 이를 목격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버티는 게 더 힘들까?

연기하는 게 더 힘들까?


아니면

혼자인 게 더 힘들까?

몹쓸 병에 걸린 것 같다.



to be continued....



[89] 김순곤, 『바람의 노래』, 1997

[90] 소갈머리: 마음이나 속생각. 또는 마음 씀씀이.

[91] 애지중지(愛之重之):매우 사랑하고 귀중히 여김.

[92] 몰골:볼품없는 모양새.

[93] 굉음(轟音): 크게 울리는 소리.

[94] 대한성서공회, 『개역개정 뱁티스트 성경전서』,(주)한일문화사, 2016, 시편 102편 7절

[95] 대한성서공회, 『개역개정 뱁티스트 성경전서』,(주)한일문화사, 2016, 로마서 14장 14절

[96] 험지(險地): 험난한 땅. 또는, 그러한 곳.

[97] 이면지(裏面紙):한쪽 면은 사용되었으나 다른 한쪽은 사용되지 않은 종이.

[98] 찐따는 '어수룩한 사람', '찌질한 사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 비속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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