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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 # 트리거 9화

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by 카테난조





Episode 6:

# 트리거 9화




39. 시간은 이리도 지났던가? 혼자만의 시간을 더는 즐기기 어려울 것 같다. 서둘러 서점을 나왔다. 가정이 생긴 이후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마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나를 누른다. 엄밀히 말하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문제가 아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즐기는 게 문제인 것 같다. 이 감정을 지금도 이해하기는 어렵다. 아버지라서 그런가? 아니면 남편이라서 그런가? 모르겠다. 적어도 난 다를 줄 알았다. 배운 대로 인생을 계획해 가르친 대로 살아가려 했다.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담백하게 말하면 인생의 주인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는 확신 또한 있었다. 그저 착각해 불과했다. 아내와의 첫 만남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무엇 하나 마음 맞는 일은 없었다. 아내와 영화관 데이트를 즐긴 적이 있었던가? 보통 커플이라면 영화 취향으로 다소 행복한 다툼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여 서로 번갈아 가며 원하는 영화를 보러 간다. 적어도 이들은 영화를 좋아함에는 틀림이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 아내는 달랐다. 영화 취향은 둘째치고 영화관 구조 자체를 싫어했다.



“자기야, 두 시간 동안 깜깜한 곳에서

서로 마주 보지도 못하고 앞만 보는 것?

난 정말 싫어. 영화관? 안 갈래.”





40. 이뿐인가? 이슬비 보슬보슬 내리는 저녁, 창가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창문 너머로 바삐 움직이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몸과 마음의 무장해제 신호인 벌게진 얼굴을 바라보며 허심탄회한[85] 이야기를 나누는, 그러한 몽롱한 자리를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자기야, 맛도 없는 술을 왜 먹어?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다고,

머리만 아프고, 주위 사람 보면 기분도 안 좋아지는데?

난 정말 싫어. 술? 안 마셔.”





41. 슬프게도 좋아하는 음식까지 다르다. 바다에서 난 음식을 대부분 비려한다. 특히, 과메기는 쥐약이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몸서리친다. 아내는 연애 시절 좋아하는 음식이라면서 선물한 포항의 자랑, 과메기. 비림의 수준을 넘어서, 상상할 수 없었던 강한 향이 입안에 가득했을 때 그녀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과메기를 먹은 후 헤어질까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골탕 먹이려 과메기를 선물한 게 분명하다고 확신해서다. 그것도 연애 후 처음 맞는 생일 선물로, 내 생애 최악의 생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를 의심했던 마음은 이내 풀어졌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진듯한 기쁨의 몸짓으로 행복을 표현하는 아내를 의심할 수는 없어서다. 나도 만들어내지 못한 잇몸 만개 웃음을 과메기가 해냈다.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자기야, 과메기 맛있지?

난 말이야, 좋아하는 것을 공유할 때 너무나 행복해.

생일 축하해.”





42. 아내를 만나면서 확고했던 내 신념은 조금씩 무너져 갔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확신의 오만함은 자기만의 통제 안에서 왕 노릇을 한다. 이러한 오만함은 비단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집단 간의 문화적 차이를 열등과 우등의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이 역시 확신의 오만함으로 가득 찬 단체이다. 이러한 부류는 자기 통제를 벗어난 순간부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철부지로 전락하거나 새로운 환경을 거부하는 폭군이 되려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면,


확신의 오만함으로

자기를 과시하는 게

초라할 뿐이다.





43. 아내가 거실에서 분주히 움직인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지 않은 채 저녁 준비 중이다. 아이들 학원 하교 시간에 맞춰 급하게 들어온 듯하다. 아내의 외출 복장을 오랜만에 본다.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아내의 모습은 참 낯설다. 아내가 저리도 늘씬했던가? 생각해 보니까 아내의 키가 169cm이다. 얼굴도 조막만 하다. 그래, 아내가 미인대회 출신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총각 시절, 그녀와 함께 다니면 주위 사람의 시선으로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나를 삼촌으로 오해해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들과 실랑이를 벌인 적도 여러 번이다. 당시에는 그렇게 불쾌할 수 없었는데, 돌아보니까 그녀와 난 그만큼 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의 주위 사람은 늘 내가 못마땅했다. 특히,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녀의 친구들이 술 취해 찾아와 헤어지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속 좁은 남자라서 그런지 결혼식 이후로 그녀의 친구를 만난 적은 없다. 만나고 싶지도 않다. 가끔 아내를 통해 친구들 소식을 듣기는 한다. 다들 외모가 출중한지라 결혼을 잘했다. 세상에서 말하는 능력 좋은 남자와 결혼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부아가 치밀어올라 상처 주는 말만 던졌다. 자격지심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나를 항상 고급이라 불러주었다. 그게 복인 지도 몰랐다. 이제는 주위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응원한 그녀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의 복장도 편한 차림으로 변해갔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모습에

미안함을 느끼는 감정은 무얼까?


함께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잊고 지냈다.





44. 아내가 거실에서 진행상황을 물어본다.



“중개사 하고 마무리하고 왔어. 계약금을 내일까지 달라고 하네. 계약금은 육천만 원이야.”



아니다, 아내에게 오늘 너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계약금이 왜 육천만 원이냐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사억 원에 계약했어.”



아니다, 그동안 못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게 좀 이해하기 어렵지? 이중 계약서를 쓰는 거야. 본 계약은 계약금 육천만 원에 육억 원 전세야. 우리는 계약금은 육천만 원을 입금하고 사억 원에 계약하는 거고.”



아니다, 다시 고급이라고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맞아, 그래서 조건이 있는데, 1년 동안은 우리가 전입신고할 수가 없어. 집주인이 1 주택자로 양도세 비과세 조건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해.”



아니다,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치, 1년 동안은 위장전입하는 거야.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계약을 3년 했으니까, 1년 지난 후 전입신고하면 아무런 문제없어. 당분간 이사 갈 걱정도 전세금 걱정도 안 해도 돼.”



아니다, 내일부터는 잘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내일까지 늦어도 이번 주까지 계약금 육천만 원을 어디서 구할지가 걱정이야. 마이너스 통장 다 끌어서도 2천 오백만 원 정도인데.... 집주인한테 미리 전세금 조금이라도 달라고 부탁해볼까?”



아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to be continued....



[85] 허심탄회(虛心坦懷):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고 솔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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