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34.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있는 중고서점에 왔다. 집에 들어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어서다. 서울 생활 후, 이곳은 아무에게도 소개하고 싶지 않은 나만의 아지트다. 사장님은 무슨 사연으로 이런 곳에서 중고서점을 운영할까? 매번 오면서도 묻지는 않았다. 손님도 거의 없기에 사장님도 나를 분명 알 터인데, 아직도 서로 눈인사만 하는 사이다. 그런 사장님이 마음에 든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사연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서울 생활하지 않나? 아내는 이곳을 꿈에도 모른다. 아내는 책 사는 것을 워낙 싫어한다. 특히, 그녀는 중고 책을 폐품이라고 여긴다. 책을 길바닥에 버려진 전단처럼 취급하는 그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불필요한 논쟁을 안 할 뿐이다.
결혼한 것을 후회하느냐고 물어본다면,
그래, 하루에도 수십 번 후회한다.
다시 기회가 주워줘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느냐고 물어본다면,
아니,
그래도 결혼해 이 지옥을
다시 걸을 생각이다.
우주를 통틀어서
지랄 맞은 내 성격을 온전하게 아는 이는
아내가 유일해서다.
35. 우현과 효상이게도 다 보여주지 못한 성격적 결함은 수두룩하다. 예를 들어서, 정신병자처럼 혼잣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화를 참지 못해 소리도 자주 지른다.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평소에는 육두문자의 사용을 즐긴다. 부정적인 성격이라 항상 비판적으로 말한다.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투가 입에 뱄다. 허락하지 않는 이가 내 공간을 침입하는 행위를 몹시 불쾌해한다. 인간관계를 무의미하고 덧없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괴팍하고 오만하다. 그리고 고독을 사랑한다. 아내와 결혼 후, 날 것의 나를 그대로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아내를 순수하고 귀여운 토끼라 생각했기에, 날 것의 나를 보여주면 얼마나 나를 무서워하거나 혐오할지가 문제여서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아내는 맹수의 왕인 호랑이였다. 아내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갈기갈기 나를 찢으려 했다. 이는 혐오에 대한 감정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래, 그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
교정교화(矯正敎化) [83]
36. 그녀가 나의 부족함을 따스하게 안아 주리라고 어린아이처럼 기대를 했다. 그녀는 단호했다. 문제자로 취급했고, 자기의 가정을 지키려고 나를 교정교화하려고 했다. 교정교화가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하나하나 대응하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못 한다. 어느 순간부터 하나의 가정이 아닌 각자의 가정에서 살아가는 기분이다. 아이라는 교집합이 있기에 살고 있을 뿐이다. 아이가 없었다면 애초에 끝났을 결혼생활이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느냐고 물어본다면,
도대체 왜 이 지옥을 다시 걸을 생각이냐고?
37.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지내는 성격은 아니기에 인간관계도 좁다. 서울 생활하면서, 그나마 만나는 사람은 우현과 효상이가 전부다. 효상이 소개로 우현을 만났지만, 난 우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현은 늘 긍정적이다. 아니,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포장한다. 우현을 볼 때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84]의 사례가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이론이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여 승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자세이다. 미봉책은 늘 더 큰 손실이 따르기 마련이다. 우현은 자기 인생이 항상 잘 될 거라는 맹목적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 지구가 자기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러한 믿음의 결말은 사기를 당하거나 호구로 살거나 둘 중에 하나다. 효상이가 물들까 걱정이다. 보통 이렇게 생각하면 우현을 멀리해야 정상이다. 친구로 두기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돌발 요인이 너무나 많아서다. 여전히 우현은 가장 친한 친구다. 그리고 친구라는 호칭을 버리지도 않을 생각이다. 우현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파렴치한 사기꾼이 되더라도, 누군가를 잔인하게 죽인 살인자라 되더라도 친구이다. 그렇다고 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된 친구를 감싸줄 마음은 추호도 없다. 친구로 여긴다면, 그가 무엇이 되든지 친구이다.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랑한다면, 그녀가 무엇이 되든지 상관없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아내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진심이다. 아내가 이처럼 변한 것도 다 내 탓이다. 그녀가 나를 미워한다고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아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묵묵히 옆에 있는 게 선택한 사랑의 도리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묵묵히 곁에 머물러준 이는, 내가 아닌 아내라는 사실을.
어느 날,
아버지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가족 앞에서 커밍아웃했다.
충격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라는 호칭은 변하지 않는다.
내게는 사랑도 우정도
이와 비슷하다.
38. 나만의 아지트에서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 게 좋다. 무엇보다 이곳은 사람이 없다. 북적거리는 대형서점에 가는 것을 꺼린다. 첫사랑과 대형서점에서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다. 대형서점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해 나만의 길을 걸으라 말하지 않는다. 최신 트렌드에 맞게 요즘 스타일을 따르는 게 삶의 정답이라고 종용하는 영업사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가? 방금 찍어낸 인쇄물에서 풍기는 파릇파릇한 열정의 냄새보다는 다소 묵직하고 조금은 쾌쾌한 인생의 향을 내는 중고 책을 사랑한다. 누군가에게 쓸모가 없어 잊힌 저 수많은 중고 책을 보노라면 비슷한 처지라고 느껴서다. 물리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기는 불가능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젊은이의 반짝거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미 그 길을 걸었기에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잔소리를 한다. 겉으로는 이들의 장래를 걱정한다. 하지만 씁쓸해지는 이 기분, 중년이라면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6개월마다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디지털 세상에서 느림의 아름다움은 웃음거리일 뿐이다. 느림의 미학을 사랑했던 친숙한 아날로그 세상은 더는 설 자리가 없다. 눈앞에 찬란한 생각으로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았던 베스트셀러가 보인다. 고향 친구를 만난 듯, 기쁜 마음에 성큼 책장으로 다가선다. 하지만, 희뿌연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다가가기 힘들다. 한동안 이곳으로 아무도 오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찬란했던 네 놈도,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아 장식품에 불과해진 한때의 영광이구나. 한때 반짝거렸던 내 모습도 오래된 책장에 묻혀 기약 없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린다. 펄떡이는 활어처럼 싱싱했던 젊은 날의 생각은 더는 찬란하지 않다.
영원하다고
찬란하다고
믿었기에
다시 반짝거리고 싶다.
to be continued....
[83] 수형자의 정신적 결함을 교정하고 선도하기 위하여 종교적․ 도덕적 방법 등으로 정신감화를 유도하여, 수형자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사회성을 배양하여 건전한 인격형성에 이바지하며 심성을 순화하고 범죄성을 제거하는 데 목적을 둔 활동을 말한다.
[84]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낙관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기대하는 사람을 비판할 때 쓰이는 이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