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30. 계약서를 쓰려고 중개소로 돌아왔다. 중개사도 오랜만에 거래를 성사시킨 것 같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잠깐, 오늘 본 매물은 다른 사람도 군침을 흘리지 않았던가? 하긴, 군침만 흘리고 다들 계약하지 않았으니 중개사도 심적으로 지칠만하다.
“사장님, 계약서예요. 찬찬히 읽어본 후 궁금한 게 있으면 말씀 주세요.”
찬찬히 읽어볼 필요도 없다. 계약금이 너무 크다. 계약금이 육천만 원이다. 일반적으로 계약금은 10%가 아니던가? 그럼 이 매물의 전세금은 육억 원인가? 사억 원이라고 했는데? 잘못 들었나?
“계약금이 육천만 원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방금 본 매물 전세금이 사억 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계약금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계약서를 들이밀며 중개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한다.
“사장님, 계약금 육천만 원은 맞아요. 그리고 이 매물 전세금도 육억 원이 맞아요. 혹시 ‘이중 계약서’라고 들어보셨어요? 집주인이 해외에 거주 중이라 이야기했잖아요. 서울은 1 주택자의 양도세 비과세 조건이 3년 보유, 2년 거주예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중개사가 내민 다른 계약서는 원래의 금액으로 적혀있다.
“사장님, 이 동네에서 현재 전세금으로는 집 구하기 어려워요. 이미 많이 돌아다녀서 알고 있잖아요. 집주인은 여기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1 주택자로 양도세 비과세 조건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세요. 그래서 전세금을 이렇게 시세보다 저렴하게 내놓았어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집주인 사정은 알겠습니다. 시세보다 낮게 전세금을 내놓은 이유가 있을까요?”
“네 맞습니다. 사장님은 거주하는 1년 동안 전입신고를 하면 안 됩니다. 그래야 집주인이 3년 보유, 2년 거주 조건이 채워지세요.”
31. 많은 사람이 군침만 흘리고 계약하기 망설였던 이유다. 집주인은 위장전입을 원한다. 그래, 전입신고 1년 정도 하지 않는 게 문제인가? 당장 들어갈 집이 없는데? 다만, 전입신고를 안 하면 확정일자를 받지 못한다. 문제가 생기면 전세금을 받을 수가 없다. 계약 기간도 2년이 아닌 1년이기에 불안하다. 집주인이 1년 지나서 계약 연장을 안 하거나 전세금을 올리면 낭패라서다.
“혹시 계약 기간을 2년으로 연장할 수 없습니까? 집주인이 1년 지나서 계약 연장을 안 하거나 전세금을 올리면 어쩌죠?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는 있을까요?”
“사장님, 2년으로 연장해 계약서를 다시 쓰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요. 다만, 매년 연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전세금은 걱정하지 마세요. 미리 말씀했는데, 이전 세입자도 계약 만기 전에 퇴실했어요. 그런데도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었어요. 집주인 마음이 좋아서요. 전세금 떼일 일은 없습니다. 하하하.”
32. 계약 만기 전에 나갔는데 보증금을 미리 줬다고? 그렇게나 순진한 집주인이 대한민국에 있다고? 총각 시절, 계약 만기 전에 집을 빼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문제는 아직 만기까지 1년이나 남은 상황이라서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에 집주인은 친절한 할머니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제가 사정이 생겨서 만기 전에 집을 빼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한데요, 혹시 보증금을 미리 받을 수 있을까요? 대신 월세 두 달 치를 미리 드리겠습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사람을 구한 후 나가야 할 것 같네요.”
친절함과 합리적인 반응은 다르다. 할머니의 반응은 당연했다. 서운하지도 않았다. 다른 세입자를 구하느라 주위 중개소를 이 잡듯 뒤졌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중개사에게 부동산 중개료를 2배 준다고 약속했지만, 이사 후, 4개월이 지나서야 세입자를 구했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순서다. 그리고 계약서가 두 장이라 계약금이 육천만 원인지, 사천만 원인지 헷갈린다.
“계약서가 두 장입니다. 혹시, 계약금은 육천만 원인가요? 사천만 원인가요?”
“아, 사장님 오해하셨구나, 계약서가 두 장이기는 한데요, 계약은 정상적인 가격으로 거래해야 해요. 그러니까 육천만 원이 맞아요. 계약금 사천만 원으로 적힌 계약서는요, 물론 사장님은 절대로 그럴 일이 없겠지만, 간혹 원래 계약서로 계약했다고 우기는 고객들이 있어서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장님, 그러니까요, 우리는 전입신고를 안 하는 조건으로 육억 원의 매물을 사억 원에 들어가는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육억 원의 매물 계약서만 작성하면, 훗날 퇴실할 때 전세금을 사억 원이 아닌 육억 원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방지 차원으로 계약서 두 장을 작성하는 거예요.
사장님 경우는, 전세금의 10%인 육천만 원을 계약금으로 입금하시고요, 그리고 입주 후 나머지 삼억 사천만 원을 입금하면 됩니다. 이해가 되세요?”
33. 그래, 너무나 잘 이해가 간다. 계약금은 육천만 원이구나. 다만, 사천만 원이든 육천만 원이든 당장 큰돈은 현재 없다. 이 돈도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해 받아야 할 판이다. 그래도 여전히 1년 계약은 불안하다. 전입신고도 못 하는데 이처럼 계약하면, 아무래도 아내한테 한 소리 들을 것만 같다.
“제 처지에 이런저런 요구하면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 집 말고도 현재 대안이 없는 상황입니다. 전입신고는 그렇다고 쳐도, 1년 계약은 너무나 불안합니다. 1년 후 계약 연장 문제도 그렇습니다, 전세금 인상도 그렇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부탁합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장님. 집주인은 해외에 거주하니 자녀분한테 전화해 사정을 이야기해볼게요.”
중개사가 전화하러 밖으로 나간다. 굳이 나가서 전화할 이유가 있나? 한 30분 정도 있었나? 환한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
“사장님, 정말 운 좋으세요, 방금 집주인 자녀분과 통화를 했는데요, 최대 3년까지 가능하다고 하네요. 어떠세요? 너무나 좋지요? 그럼 3년으로 계약서 작성할까요?”
2년도 아니고 3년? 구린 게 있어서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횡재다. 3년 정도 더 거주할 수 있다면, 1년 동안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도 아내에게 할 말은 있다. 1년 지난 후, 전입신고를 하면 되니까.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니 그동안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간 기분이다.
“좋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계약금은 언제까지 입금하면 좋을까요?”
“혹시, 내일까지 가능할까요? 그래야 집주인도 좋아할 것 같아요. 집주인에게 3년 연장까지 받아내느라 좀 떼를 부려서요. 하하하. 아, 그리고 집주인은 해외에 있어서 계약금과 잔금은 자녀분 통장으로 입금하면 됩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일단, 계약금이 문제입니다. 내일까지요? 노력해보겠습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