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45. 아내는 저녁 준비로 바쁜지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갑자기 안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통장을 툭 던지며 말한다.
“혹시 몰라서, 삼천만 원이야. 계약금을 사천만 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육천만 원이라고? 그래도 오백만 원이 부족하네. 집주인에게 한 번 이야기해볼게. 당신보다 말주변[86]이 더 있으니까.”
웬 통장? 너무 뜻밖이다. 아내의 비자금인가? 큰돈을 어떻게 모았지? 돈 없다고 탈수기에 넣어 그렇게 쥐어짜면서? 그녀에게 미안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처녀 때부터 가지고 있던 돈이야. 그동안 필요 없는 돈이라 말을 안 했어. 집주인한테 계약금을 미리 받을 수 있으면 좋고”
46. “좋은 게 좋은 게지”의 성격이 아닌지라 그녀의 말을 믿기는 어려웠다. 정말 그 돈이 없어서 힘들었던 날들이 많아서다. 삶의 벼랑 끝에 서서 서로의 마음을 난도질하기 전에 미리 말해줄 수는 없었는가? 벌써, 5년 전 이야기다. 아내는 볼 때마다 살이 쪄서 보기 싫다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내와 먹는 양이 그리 다르지도 않다. 따지고 보면 가족 중 아내의 먹는 양을 따라갈 자는 없다. 아내는 먹는 것을 참 좋아한다. 가족 중 누군가 밥을 먹으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옆에서 말동무 역할을 한다. 말동무뿐만 아니라 식사도 함께한다.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을 식사할까? 아내를 제외하고 누구도 이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분명히 대식가다. 하긴 생각해 보면 아내가 언제 밥을 먹는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항상 우리 옆에서 식사하니까.
아내는 먹는 것을 참 좋아한다.
아니다.
아내의 배려였다.
47. 엄청난 식사량을 고려하면 기초대사량이 좋은 게 분명하다. 아내는 살이 찌지 않는다. 세월의 풍을 혼자 맞아 눈에 띄게 퇴화한 나를 아내는 이해하지 못한다. 노력의 문제라 생각해서다. 정답이 무엇이든 아내의 잔소리는 한 귀로 흘리면 된다.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와 배만 볼록하게 나온 새치로 가득한 중년의 아저씨와 앙상블은 그리 반갑지 않다. 가끔 거울로 비친 두 명의 실루엣을 만나면 현실을 외면하고 싶다. 길거리를 나서면 삼촌과 조카로 오해하는 이가 더 많다. 누가 봐도 그렇다. 아내가 물리적으로 9살이나 어리고 심지어 심각하게 동안이다. 이런 오해가 처음에는 기분이 좋다. 마치 내가 능력이 좋아 보이게 느껴서다. 하지만 이런 오해도 반복하면 오히려 기분이 더럽다. 어리고 예쁜 아내와 함께 살지 않은 남자라면 내 기분을 모른다. 함께 있을 때조차 뭇 남성들이 다가와 아내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남편이에요.”
48. 나를 뻔히 바라보면서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떠나는 하이에나들, 그들에게 나는 처음부터 경계대상은 아니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아내의 미모로 일어나는 해프닝을 즐길 수는 없을까? 그런 남자가 될 수는 없을까?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들의 위용[87]은 순수하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는 없다. 이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과시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강함을 표출하는 침팬지처럼 이들의 아름다움은 가히 위협적이고 과시적이다.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그럴 수 없어서다. 그럴 용기조차 없다. 대상을 겁내지 않는 기운을 보일 때 용기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상을 겁내지 않는다고 대상의 감정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을까? 반대로 대상을 겁내면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행동한다면 용기가 있는 사람일까?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49.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아내를 만나려고 세상에서 말하는 용기를 내어본 적이 없어서다. 거짓말 같은가? 순도 100%의 솔직한 답변이다. 아내의 외모는 출중하다. 사실이다. 심지어 아내는 남자의 로망인 무용과 출신이다. TV에 출연한 웬만한 여성 연예인을 보아도 아내보다 아름답다고 생각지 않는다. 사랑의 콩깍지가 씌어서 그렇다고?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지만, 아내를 만나려고 용기를 내어본 적이 없어서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의 콩깍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렇다고 능력이 좋아 돈이 많은 남자도 아니다. 알지 않은가? 아내가 그동안 말하지 않은 삼천만 원으로 이처럼 꽁한 마음을 지닌 남자다. 또한, 아내의 아름다운 외모로 많은 이가 성격까지 온화하리라 믿는 이가 많다. 연애시절, 데이트 코스로 사주 카페를 자주 다녔다. 난 기독교인이지만, 굳이 종교 문제로 아내와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주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통계 자료라 생각한다.
“여자 친구가 참 인상이 좋네. 사주를 보니까 여자 친구는 나무가 많아. 자네는 불이 많고. 이런 조합을 목생화라 하는데, 여자 친구의 나무가 자네의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거야. 나무와 불은 궁합이 아주 좋아. 다만, 여자 친구 마음고생이 심하겠어. 자네,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 복 많은 거야. 자네는.”
50. 사주 카페에서 항상 듣던 소리다. 그래, 누가 봐도 내가 복 많은 놈이 맞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옆자리를 노력하지 않고 얻었으니. 더군다나 사주까지 내게 도움이 되는 여자다. 주위에서 보면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쯤 되면 가스라이팅[88]으로 아내를 조종한 게 아닐까 의심할 만하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가정에서 눈치를 보는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나다. 아내는 불이고 난 불 속에 갇힌 양에 불과하다. 아내가 화를 내기 시작하면 주위의 모든 것을 다 태우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 불이다. 모든 것을 다 삼키려는 불. 양은 온순한 외모와 달리 공격성을 지녀 화가 나면 이곳저곳 들이받는다. 양의 공격성도 불 앞에서는 초라하다. 나는 정말 무섭다. 이런 내가 무슨 가스라이팅을 할 수 있겠는가?
아내가 날 선택했을 뿐이다.
사냥감을 정하듯.
나는 아내가 무섭다.
to be continued....
[86] 말주변: 말을 이리저리 척척 둘러대는 재주.
[87] 위용(偉容):훌륭하고 뛰어난 용모나 모양.
[88] 가스라이팅: 상대방의 자기 의심으로 판단력을 잃게 해 상대방에게 지배력을 행사해 상황을 조작 또는 몰아가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