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안녕하세요, 전세 사기 범죄를 신고하신다고요?”
15. 짧은 스포츠머리, 오른쪽 눈썹 위에 작은 흉터, 그리고 두꺼운 전완근이 눈에 띄는 다소 배가 나온 중년의 남자가 말을 건넨다. 무섭다. 여기가 경찰서가 아니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그를 조직 폭력배라 해도 믿을 외모다.
“네, 아무래도 제가 전세 사기를 당한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으니 이쪽으로 오세요.”
16. 형사 앞에 앉아 있다. 누군가 나를 슬쩍 보면 용의자라 착각하지 않을까?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범죄심리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한다. 그중 용의자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형사와 대치하여 전개하는 심리전을 특히 즐긴다. 스산한 음악을 곁들인 인간미 없는 취조실은 오직 용의자와 형사, 둘만을 위한 무대이다. 침묵한 채 서로의 눈을 강하게 바라본다. 말은 안 하지만 형사는 용의자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용의자는 스스로 무죄라 확신한다. 기세에 눌리면 용의자도 형사도 원하는 바를 이루기 어렵다. 드디어 입을 열어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니가 이 신청곡 엽서 보냈지?”
“네”
“전에도 여러 번 보냈지?”
“네”
“꼭 비 오는 날 틀어 달라고 그랬지?”
“네”
“우울한 편지, 이 노래 나올 때마다 여기서 여자 죽은 것 알지?”
“아니요”[118]
.....................................................................................
“저기요, 저기요, 선생님?
성함을 말씀해 주세요.”
17. 잠시 졸았던가? 형사의 질문을 듣지 못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을 버거워하는지, 정신은 나와 발맞춰 걷지 않는다. 우체부가 내 이름을 안효상이라고 불렀다고 착각한 것처럼. 요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이래저래 끔찍한 저주에 걸린 게 분명하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름은 김승기입니다.”
18. 형사는 내 사정을 집중해 들었다. 하지만 얼굴에 쓰인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사기 사건은 자주 있는 일이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덤덤한 표정이어서다.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느끼기 어렵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렇게 손이 떨리게 무서운 일이 항상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서일까? 형사가 딱하게 보인다. 얼마나 많이 무서운 사건을 자주 겪었으면 이처럼 무덤덤하게 반응할까? 이상하다. 바로 전만 해도 무섭게 느껴졌던 형사의 외모가, 특히 오른쪽 눈썹 위에 작은 흉터와 두꺼운 전완근은, 그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말하는 것 같았다.
“잘 알겠습니다. 일단 댁에 귀가하세요.
곧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19. 거실 소파를 등받이 삼아 앉아 있다. 평소처럼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노트북을 열어 수업을 준비하는 척한다. 왼손으로 마우스를 잡아 의미 없는 원과 직선 그리고 대각선을 마우스 패드에 그린다. 부자연스러워 보이면 안 된다. 주로 직선을 그리며 가끔 대각선과 원을 그려 정말로 수업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지금 난 수류탄이 사방에서 터지는 지뢰밭 한가운데에 서 있다. 지뢰의 위치를 숙지했기에 평소에는 걱정이 없다. 하지만 외부에서 무작위로 날아오는 수류탄과 대치할 때는 지뢰의 위치를 혼동한다. 그만큼 불안하다. 아내와 대화를 최대한 피해야 한다. 당장에라도 탄로 날 것 같아서다. 힘들게 모은 아내의 비상금까지 전세금으로 보탰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험한다. 힘들게 끌고 온 인생의 종착지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굳어간다. 안 된다. 정신 차려라. 오른손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이대로 송두리째 행복을 빼앗길 수는 없다. 언젠가는 아내에게 이 상황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스스로 생명을 단축하는 미련한 행동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당분간 월세를 대체할 보증금이 어느 정도 있다. 그래,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움직여야 한다. 연기해야 한다. 들키지 않아야 한다.
대각선, 대각선, 원, 대각선, 대각선, 원,
대각선, 원, 대각선, 직선, 직선, 직선,
소름…….
난 왼손잡이다.
그리고
노트북 전원을 켜지 않았다.
20.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가 깔깔대며 웃는다. 목을 쭉 빼 무슨 일인가 굳이 궁금하지 않아도 된다. 돌고래는 한쪽 눈을 뜨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포식자의 출현을 감시하며 잔다. 수면 중 오른쪽 눈을 감으면 왼쪽 뇌가 휴식을 취한다. 반대로 왼쪽 눈을 감고 자고 있다면 오른쪽 뇌가 쉬는 중이다. 돌고래는 수면 중에도 늘 깨어 있다. 주변도 경계해야 하고 익사하지 않으려면 물 밖으로 올라와 호흡도 해야 해서다.[119] 아내를 대하는 정확한 내 모습이다. 난 두 눈과 두 귀를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돌고래다. 거실에서 TV를 시청하면서, 수업을 준비하면서, 빨래를 개면서, 물건을 정리하면서, 아내가 주방에서 통화하는 내용을 대부분 감청[120]한다. 쪼다처럼 몰래 엿듣는 게 아니다. 물론, 감청은 수사기관의 영장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수사기관의 영장을 포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가정에서 말하는 영장은 서로의 대화를 들어도 된다는 암묵적 용인[121]이다.
아내는 통화를 통해
현재의 기분을 넌지시 내게 알린다.
신혼 초에는 그 신호를 몰랐기에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다가
아내의 벼락을 맞아 너덜너덜해졌다.
그래서 경험은 중요하다.
21. 나의 감청은 가정의 가지런함을 위해서다. ‘가지런하다’라는 뜻은 “여럿이 층이 나지 않고 고르게 되어 있다.”이다. 인간관계에서 여럿이 층이 나지 않게 조화를 이루려면 누군가는 양보해야 한다. 이를 타협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협이라는 과정은 누군가는 불만 사항을 제시해야 하고, 누군가는 불만 사항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 과정 안에서 서로 간의 차이점을 이해한다. 차이점을 이해하면 비로소 양보가 이루어진다. 힘의 차이를 이해해야 서로 간의 원하는 타협을 이룰 수 있다. 그때 적용하는 전략이 처세술[122]이다. 나와 아내의 힘 차이? 아이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은 내 눈치를 보지 않는다. 아비의 지엄함[123]을 가르치려 화를 낸 적도 있다. 부끄러운 행동이다. 아내는 다르다. 눈빛만으로 아이를 제압한다. 매일 아내와 아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만의 규칙은 분명히 존재한다. 가끔, 난 그게 부럽다. 그래서 경험은 중요하다. 결국, 가정의 분위기는 아내의 기분으로 결정된다. 실세[124]의 기류[125]를 파악해 대처하는 것은 처세술의 기본 중 기본이다. 많은 이가 처세술을 사회에서만 적용하는 전략이라 생각한다.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는 가정이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126]
자기 자신을 닦는 수신(修身)은
처세술로 어려울 수 있다.
스스로 속이기 어려워서다.
하지만, 집안을 가지런하게 한다는
제가(齊家)는 처세술로 가능하지 않을까?
to be continued....
[118] 봉준호 감독, 『살인의 추억』, CJ엔터테인먼트, 2003, 2시간 11분, Blu-ray.
[119] 조홍섭, 『서서, 떠서, 누워…고래는 물속에서 어떻게 잘까?』,
한겨레, 2021.03.23.,
https://www.hani.co.kr/arti/animalpeople/ecology_evolution/987883.html]
[120] “감청은 수사기관이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국가기관 혹은 정보기관이 상시로 행하는 감시 및 정보수집 활동으로 합법적 정보활동이다.”
[출처: 남보수, 『도청과 감청의 차이점은』,대경일보, 2019.07.23.,
http://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86693]
[121] 용인(容認):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정함.
[122] 처세술(處世術)은 세상을 살아갈 때 상대 관계에서 능동적이고 다양한 활동과 판단 결정을 하게 되는 사고력 행위이다. [출처:나무위키]
[123] 지엄하다(至嚴--): 매우 엄하다. [출처:국립국어원]
[124] 실세(實勢): 실제의 세력이나 기운.
[125] 기류(氣流): 어떤 일이 진행되는 추세나 분위기.
[126]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