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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카혼타스 Oct 22. 2023

나를 감성으로 물들여줄 좋은 사람, 바로 당신입니다

글 쓰는 일상가의 감성에세이 ≪일상감성≫ / 윤선미

2019년 겨울, 내가 사는 동네에도 책방이 생겼다. 3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당진서점’이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었는데 예쁜 책방이 생기니 더 좋았다. 그 책방이 집과 너무 가깝지 않아서 오가다 들르는 곳이 아니라 작은 마음을 먹어야 갈 수 있는 곳이어서 더 좋다. 책방 가야지 하고 집을 나서는 날은 마냥 들뜨는 기분이다.

책방 선생님은 처음 본 날부터 친근했다. 조용히 부담스럽지 않게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분이었다. 책을 권할 때는 한없이 세심하다가도 책방이 자리한 동네의 오랜 역사를 설명할 때는 힘주어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좋았다. 책방에 처음 갔던 날, 주변 동네를 천천히 둘러보고는 바로 알았다. 나는 이 동네를 좋아하겠구나. 책방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 오래오래 여기에 있기를 바라게 되겠구나.

면천 책방 <오래된 미래>. 4년이 지난 지금도 책방은 그 자리에 있다. 물론 책방 선생님도.

책방에서 쌓은 추억이 많다. 지독한 편독쟁이인 나는 맥락 없이 자유롭게(책방 선생님의 철학이 담긴 섬세한 책 분류임이 틀림없겠지만) 진열된 서가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며 분야도 작가도 상관없이 그냥 끌리는 책을 발견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나를 더 많이 드러내 보여야 하는 소모임보다는 대규모 작가 강연을 더 좋아하는 나였지만, 작은 책방의 더 작은 공간에 오밀조밀 모여 앉느라 자꾸만 눈이 마주쳐 어색했던 작가와의 만남을 한 번이라도 놓칠까 안달하는 내가 되었다.

비가 와서, 활짝 핀 꽃이 예뻐서, 주말에는 다른 약속이 있으니까. 예정에도 없던 오후 휴가를 쓰고 갑자기 책방을 찾을 이유는 많았다. 머리를 숙이고 난간을 꼭 잡아야 하는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서 삐걱삐걱 소리 나는 나무 바닥을 몇 걸음 걸어 창가 자리로 가 앉으면 나무 의자의 딱딱함마저 정겹다.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내리 책을 읽기에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책방을 드나들며 알게 된 사람이 몇 있다. 근 이십 년을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그간 만났던 사람들과는 확연히 결이 달랐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만, 약속 없이 어딘가에서 마주치면 그 누구보다도 반가운 사이. 자주 만나면서도 말을 편하게 놓지 않고,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이. 본업과 취미의 경계가 모호한 여러모로 재주가 많은 사람들이다.

윤선미 작가님도 책방에서 처음 만났다. 수요일 저녁마다 책방 2층에서 손바느질을 하는 모임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항상 어렵다며 수줍게 본인 소개를 하던 바느질 선생님이었다. 수업을 진행하면서 한 번씩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유머와 위트에 모두가 깔깔 웃다 보면 도대체 부끄럼 탄다는 사람은 어디로 갔나 싶었다. 

서둘러 퇴근해서 책방에 도착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에 시작하는 수업이었지만, 중·고등학교 실과시간 이후로는 바느질을 해본 게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전혀 관심 없는 분야였지만, 매주 하루씩은 밤마다 책방에 갈 수 있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신청했다. 깜깜하고 고요한 시골 동네를 노란 불빛으로 따뜻하게 밝혀 주는 책방에서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며 바느질한다니! 손바느질에는 재봉과는 다른 아마추어적 감성과 친근함이 있다. 

얼마 안 가서 바느질 선생님이 ≪자연담은 감성리폼≫, ≪겨자씨의 감성살림≫을 쓴 작가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업을 진행하는 중에도 이따금 한 번씩 사색에 잠기는 모습에서 뭔가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어느 모로 보나 딱 작가님 그 자체였다. 글 쓰는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글 냄새가 있다. 그들은 말에도 아득한 깊이가 있다. 

어느 겨울, 작가님이 세 번째 책을 독립출판으로 출간 준비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산문집 ≪일상감성≫의 출간을 텀블벅 펀딩(창작자가 펀딩에 참여한 불특정 다수의 후원자에게 후원금으로 제작한 창작물을 선물로 제공하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한다고 해서 한달음에 달려가 참여했다. 생애 첫 독립출판으로 고군분투 중인 작가님에게 속으로 응원을 보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힘을 보탤 수 있다니 너무 좋았다. 게다가 후원자에게는 책을 선물로 준다니!

책방에서 작가님을 만나 ≪일상감성≫ 여러 권을 받았다. 작가님이 직접 서명을 해주기로 했던 터라 누구에게 선물할까 행복한 고민을 했더랬다. 한 권은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나머지는 좋은 사람들에게 전해서 작가님을, 작가님의 책을 널리 소문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돌아와 책을 읽던 중 ‘혼자만 알고 싶지는 않다’ 편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공식적으로 평화주의자이자 예의 바른 간섭주의자인 나는 혼자만 알고 싶은의 수식어를 좋아하지 않는다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너무 좋아서너무 예뻐서알려주면 소란스러워질 것 같고 그 매력이 사라질 것 같은 걱정 때문이라는 것을사실 나도 마찬가지다그럼에도 나는 내가 아는 것을 혼자만 알지 않고 알려주고 싶다.     


읽어보고 좋은 책을 선물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에는 작가와 제목만으로 누구에게 선물할까를 생각했다. 나는 감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 중에는 감성적인 사람이 꽤 있다.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나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계획적이고 건조한 사람인데. 핸드폰 메시지에 한글과 숫자 빼고는 기껏해야 물결(~)과 웃음 이모티콘(^^) 밖에 못 쓰는 사람에게 그들은 연애편지 같기도 짧은 시 같기도 한 말랑말랑한 답을 매번 보내준다. 표현에 인색한 나를 계속해서 곁에 두는 그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몇 명이 마음속에서 정해졌다. 이미 충분하게 일상을 감성으로 채우는 그들이지만 내 마음을 살짝 얹어서 전하고 싶었다. 

“나는 감성적인 사람을 좋아합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를 감성으로 물들여 줄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당신도 그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평소의 나였다면 못했을 말이지만 책과 함께여서 용기가 났다. 

한동안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놓고 되뇌었던 책 속 구절을 적어본다. 바라보는 마음과 겪어 내는 순간이 아름답게 보이는 시간을 살아내라고, 반복되는 일상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책 속에서 가장 내 마음을 세게 때렸던 문장이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아주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고

할까 말까를 두고 고민한다.

많이 알고 있다고 모든 것이 가능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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