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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카혼타스 Oct 22. 2023

이런 날에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지 않니?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집과 가까운 거리에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이 있다. 걸어서 10분이면 넉넉히 도착하는 산책 하듯 들르기 좋은 당진도서관. 요즘은 좀체 못 갔지만 휴직 중에는 거의 매일 드나들었다.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나고 평생학습 강좌도 듣고, 좋은 기억이 많아서인지 퇴근길에 그 앞을 지날 때면 여전히 반가운 곳이다. 도서관 2층에는 아담한 북카페가 있다. 코로나로 한동안 운영을 안 했지만 그전에는 도서관 안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북카페에는 장애인 바리스타 두 명이 일한다. 주문받으며 건네는 멘트는 친절하지만 언제든 누구에게든 토씨 하나까지 항상 똑같다. 1,500원이라는 가격이 무색할 만큼 맛있는 아메리카노를 내주지만 녹차라테를 덜 달게 해 달라는 주문에는 답이 없다.     

거의 매일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메뉴를 주문하는 나를 전보다 편안하게 대한다는 느낌이 든 때부터는 괜히 인사도 더 크게 하고 괜히 쓸데없는 질문도 해보곤 했다. 더운 여름날에는 주문한 커피를 받으면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슬쩍 내밀어 보기도 하고 간식으로 싸간 귤을 나누어 먹은 날도 있었다.     

매번 마시던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메이플 토스트는 각 1,500원. 가장 비쌌던 생과일 딸기주스와 치즈케이크는 3,500원씩이었다. 여타 카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격이면서도 주문 음료 한 잔마다 스탬프를 한 개씩 찍어줬다. 쿠폰에 스탬프 열 개를 모두 채우면 메뉴에 있는 음료 중 무엇이든 하나를 공짜로 줬다. 아메리카노 열 잔으로 완성한 쿠폰으로 딸기주스를 요청해도 당연하다는 듯 내줄 뿐이었다.      

사실 북카페 쿠폰 시스템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혼자 있을 때 사용하게 되면 공짜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아이의 음료를 함께 주문할 때는 더 비싼 핫초코나 아이스티에 공짜 쿠폰을 사용했다.      

평소 도서관에서 자주 만나던 그 사람의 지갑 속에 스탬프가 빼곡히 찍힌 쿠폰 여러 장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쿠폰을 왜 안 쓰냐는 질문에 그 사람이 대답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큰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돈을 내고 마셔도 너무 싼 값이라 미안한데, 도저히 공짜로 마실 수는 없어서.”         

살면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싶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보고 겪는 무수한 일에 대해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잠깐 멈춰 서서 깊게 들여다보는 삶을 살 수는 없는 걸까? 그 사람과의 짧은 대화를 계기로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행히 꽤 오래전부터 올바른 태도와 바람직한 자세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매 순간이 올바르고 바람직하지는 못했겠지만.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삶의 태도나 자세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던 어린 시절에도 ‘아!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라든가 ‘가족이나 친구, 선생님, 이웃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거구나!’와 같은 가르침을 주는 친구가 이미 나에게는 있었다. 초록지붕 집에 사는 수다쟁이 주근깨 소녀. 예쁘지는 않지만 몹시 사랑스러운, 무한 긍정의 아이콘 빨강머리 앤.      

앤을 처음 만난 건 TV 애니메이션에서였다. 어릴 때는 그저 만화가 재밌어서 좋아했을 텐데 커서도 빨강머리 앤 굿즈만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반가운 것을 보면 그냥 좋아하는 것 이상임이 분명하다. 몽고메리의 원작 소설뿐 아니라 애니, 영화, 드라마까지 모두 섭렵했음은 물론이고 집과 사무실 눈길 닿는 곳곳마다 앤이 있다.    특히, 백영옥 작가의 에세이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좋아한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선물한 책을 모두 세어본다면 이 책이 압도적 일등일 것이다. 생일, 크리스마스, 새해맞이 선물로도 퇴사, 진급, 수상 축하선물로도 언제든 누구에게든 딱 알맞은 선물이 된다.         

작가는 〈빨강머리 앤〉을 열 번 이상 봤다고 한다. 많이 지쳤을 때,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을 때, 지독히 불안해졌을 때, 실패하고 울고 싶어질 때마다 다시 봤다고. 앤과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며 깨달은 것은 어떤 일을 그냥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이 책이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읽고 난 이후의 행동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길 바란다고 했다.      

이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내 마음도 비슷하다. 받은 날 바로 쭉 읽으면서 추억 속의 앤과 다시 만나도 좋겠고, 그냥 어딘가 툭 내려놓고 잊고 지내다 왠지 모를 쓸쓸함과 불안감으로 혼자 몰래 눈물 흘리는 날 갑자기 이 책이 눈에 들어오면 더 좋겠다 하는 마음이다. 앤의 혼잣말이, 다이에나, 마릴라 아주머니, 매튜 아저씨에게 건네는 말이, 꼭 내 어깨를 꽉 붙잡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해주는 말로 들려서 살면서 힘든 상황이면 자연스럽게 앤의 말을 떠올리고 힘을 얻게 된다. 책과 함께 나의 앤을 그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책에는 애니메이션 속 장면과 대사가 중간중간 섞여 있다. 여기저기서 자주 인용해서 익숙한 장면도 많지만 새삼스레 앤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장면도 있다. ‘아! 앤은 이런 아이였지!’라는 생각을 바로 하게 되는 몇몇 대사를 적어본다. 앤에게 제일 배우고 싶은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전요.

뭔가를 즐겁게 기다리는 것에 그 즐거움의 절반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즐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즐거움을 기다리는 동안의 기쁨이란 틀림없이 나만의 것이니까요.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들이 아니라

진주알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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