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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카혼타스 Oct 22. 2023

소설은 잘 모릅니다만, 이 책은 자신 있습니다

델리아 오언스 장편소설《가재가 노래하는 곳》/정유정 장편소설《7년의 밤》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한 호흡으로 단숨에 쭉 이어 읽어야 제맛인데 아직은 짬짬이 몇 장 읽을 수 있는 시간밖에 못 내는 경우가 많아서 더 그렇다. 서점에 가서도 어지간해서는 소설 코너는 들여다보지 않고 지나친다. 가끔 소설책을 선물 받거나, 읽고 있던 책에서 언급한 책을 찾아서 읽으려고 보니 소설이었다거나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발적으로 소설을 선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다가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소설 차별주의자이고 수필 편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설을 힘들어하는 그에게는 때때로 소설 한 권씩을 권하는 책방 선생님이 있는데, 추천받은 소설을 착실히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데 정점을 찍어준 소설이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고 했다.

낯선 책을 읽을 때는 작가의 말이나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는 습관이 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도 옮긴이의 말을 통해서 델리아 오언스가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해 온 과학자이며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 출간한 첫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가는 이 소설이 ‘외로움’에 대한 책이며 ‘고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가혹한 해안가 습지 판잣집에 홀로 남겨진 일곱 살 소녀 ‘카야’의 외로움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날 잡고 쭉 읽어야만 했다.

책을 한 장 한 장 읽을수록 점점 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해안가 습지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소름 끼치도록 외롭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카야는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습지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로 만들어졌다니 빨리 보고 싶은 마음과 실망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만약 영화를 보게 된다면 몇몇 장면에서는 책 속의 아름다운 문장이 떠오를 것만 같다.     

 하루가 저물기 시작해 해가 한숨을 쉬며 버터 빛깔로 빛이 바랬을 때

 지는 해가 습지에 가만히 걸렸다 

 그레이트 블루 헤론은 파란 수면에 비치는 잿빛 안개색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봐.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엄마가 습지 탐험을 독려하며 카야에게 하는 말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숲 속 깊은 곳, 야생동물이 야생동물답게 살고 있는 곳을 말한다. 외롭게 홀로 남겨진 카야가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주변으로부터 도움도 받으면서 사랑도 하고 배신도 당하고 이별도 하는 과정을 통해 카야답게 살아남는 이야기의 제목으로는 안성맞춤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습지라는 신비로운 공간과 주인공 카야와 테이트의 세심한 감정선에 이끌려 다니며 그저 감탄하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얼마 전 다시 읽으면서 문득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소설가로 꼽으라면 김훈, 은희경을 꼽는데, 항상 말할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두 명의 소설가가 있다. 바로 정유정과 김영하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 ≪새의 선물≫ 같은 역사소설, 성장소설이나 로맨스 장르를 좋아하고, 무협소설, 스릴러, 추리소설은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을 읽고부터는 책 취향에 확신이 없어졌다.

그 후로 정유정 작가의 소설 읽기에 몇 번 도전했는데 ≪종의 기원≫은 완독했지만 읽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다. 책장에 꽂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무서워서. ≪진이, 지니≫ 북토크에서 정유정 작가를 만나 “진이, 지니 같은 안 무서운 소설을 많이 써주세요!”라고 말씀드리기도 했는데, 얼마 후 출간된 소설은 ≪완전한 행복≫이었다. ≪완전한 행복≫은 결국 끝까지 읽지도 못했다. 김영하 작가는 TV 프로그램과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강연을 통해 처음 만났는데 소설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고 재밌었지만 그의 소설은 너무 험악했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제외하고는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는 중에 ≪7년의 밤≫이 문득 생각났을 때는 그저 내용 중에 살인사건이 나오고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형식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다 읽고 나서 두 책을 나란히 놓고 살펴보니 비슷한 점이 꽤 많았다. 두 책 모두 ‘해안가 습지’와 ‘세령마을’이라는 공간 자체가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큰 편인데 책 첫머리에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책을 읽다가 새로운 인물이나 사건이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첫 장의 지도로 돌아가서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어디인가 찾아보게 된다. 

무슨 책이든 첫 문장을 여러 번 읽어보고 오래 생각하는 편인데, 두 소설 모두 첫 문장이 꽤 인상적이다.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로 시작하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방대한 이야기가 ‘습지’와 ‘늪’ 크게 2부로 나눠져 있다. ≪7년의 밤≫의 첫 문장은 이미 너무나도 유명한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이다. 두 책 모두 끝까지 읽고 나면 첫 문장이 얼마나 잘 써진 문장인지 바로 알 수 있다. 500페이지 정도의 두꺼운 장편소설을 한 문장으로 완벽하게 담아냈으니.   

두 소설 모두 살인사건을 기준으로 과거 또는 미래의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살인자를 찾기 위해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하며 끝까지 끌어가는 여타의 스릴러 소설과는 달리 두 소설 모두 누가 살인자인지 누가 악역인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시작한다. 오히려 주인공의 흔들리는 감정선이나 성장하는 모습,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변화를 가까이 들여다보면서 같이 슬퍼하고 같이 성장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점이 두 편의 영화가 모두 원작만큼의 큰 호응을 끌어내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종종 오로지 소설만 읽는다는 사람을 만나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시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에세이를 안 읽을 수가 있지? 소설은 내 취약 분야인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무슨 책을 선물하지? 다양하게 읽으려고 항상 노력하지만 여전히 편독이 심한 나로서는 어려운 숙제임이 분명한데 당분간은 해결책이 생긴 셈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과 ≪7년의 밤≫을 묶어 선물하면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차례차례 읽어보고 두 책을 비교하는 재미를 느껴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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