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 테드 창
가장 좋아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하나씩 말하라면 <극한직업>과 <멜로가 체질>이다. 사실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고민의 여지가 없지만, 드라마는 너무나도 좋아해서 1위 자리가 계속 바뀐다. 당장 기억나는 드라마만 해도 여럿이다. <연애시대>, <온에어>, <그들이 사는 세상>, <상속자들>, <괜찮아, 사랑이야>, <사랑의 온도>, <뷰티 인사이드>. 쭉 나열해 놓고 보니 수다스러운 드라마를 좋아하는 내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멜로가 체질>은 첫 회부터 챙겨 보지도 않았고, 본방 사수를 한 드라마도 아니었다. 어쩌다 2회 재방송을 보게 됐는데 너무 재밌어서 그 뒤로 본방송이든 재방송이든 볼 수 있는 시간에는 한 번이건 두 번이건 닥치는 대로 봤다. 주인공이 딱히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여러 명의 서사가 섞여 있는데, 모든 캐릭터가 사랑스럽고 많은 대사가 가슴에 와닿았다.
난 택배 받는 것도 좋아하고, 식당에서 메뉴판 보는 것도 좋아하는데 그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 일이 좋아요. 무엇보다 소중한 이 일을 작가님과 하고 싶다는 거고요. 막 아니고 잘. 나 한 번 믿어 봐요.
시작. 시작은 본디 끝을 향해 달리는 것이지만 우린 그것을 끝이 아니라 완성이라 부른다. 성공이나 실패에 그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것. 시작의 의미는 완성에 있는 것.
원래 세상은 조금 더 착한 사람들이 조금 더 애쓰고 살 수밖에 없어요. 그게 막 엄청난 손해 같지만 나쁜 사람들한테 세상을 넘겨줄 수는 없잖아.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구를 지키고 있는 거야.
영화 자체보다는 극장이 싫었다. 폐소공포증이 약간 있는 편인데, 영화 상영 전 비상 대피로 안내를 보면 상영관에 꽉 갇혀 버리는 느낌이었다. <극한직업>도 이미 천만 영화로 유명해진 한참 후에서야 집에서 봤다. 시작은 주말에 영화나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어느새 깔깔 소리 내서 웃으며 보고 있었다. 첫 장면부터 ‘뭐지 이 영화!’ 싶더니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웃겼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영화를 떠올리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실적 부진으로 해체 위기에 처한 마약반 5인방이 잠복수사 중에 마약조직 아지트 근처의 치킨집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경찰 신분 위장을 위해 치킨을 팔기 시작하는데 수사에는 진척이 없고 오히려 장사만 너무 잘된다. 극 중 영호 역의 이동휘 배우가 “왜 자꾸 장사가 잘되는데!!!”라고 절규하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너무 재미있다. 이무배 일당이 유명세를 탄 ‘수원 왕 갈비통닭’ 프랜차이즈를 마약 운반책으로 이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마약반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본격적인 범죄조직 소탕 작전이 시작된다. 이무배와 테드창 패거리의 마약거래 현장에 치킨 배달 봉고차를 타고 나타난 5인방의 마지막 액션 장면에서는 짜릿한 통쾌감을 느낄 수 있다. “니가 소상공인을 모르나 본데 우린 다 목숨 걸고 일해!” 고반장의 마지막 대사 한 줄에 소상공인의 마음을 잘 담아낸 이병헌 감독은 여러 기관으로부터 많은 공로패를 받았다고 한다.
좋아하는 드라마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편이지만 영화는 웬만해서는 두 번 보는 일이 없는데 <극한직업>은 적어도 다섯 번은 본 것 같다. 나는 물론이고 아이들도 다음 장면이 어떻게 이어질지, 무슨 대사가 나올지 다 안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온 가족이 합창을 한다.
그즈음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비슷한 시기에 내 마음을 끌어당긴 두 작품의 감독이 같은 사람이었다. <극한직업>이야 1,600만 관객으로 역대 흥행 순위 2위라는 성적을 거뒀으니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하더라도 <멜로가 체질>은 시청률만 봤을 때는 대중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이병헌 감독의 무언가가 나와 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캐릭터, 유머 코드, OST, 특히 쉴 틈 없이 퍼붓는 대사가 그랬다.
얼마 전 읽고 있던 책에서 ‘테드 창’이라는 이름을 보고 자연스럽게 <극한직업>을 떠올렸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나와 똑같은 반응일 것이다. 오정세 배우가 연기한 테드 창. 한국 이름이 창식이인데 영어 이름을 지을 줄 몰라서 테드 창이 된 사람. 이무배(신하균 분)와의 피자집 티키타카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있다.
‘테드 창’이라는 작가가 궁금해졌다. 검색해 보니 미국의 유명한 SF 작가였다. 혹시 이병헌 감독이 영화 극본 작업을 하면서 평소에 좋아하던 소설가의 이름을 따와서 배역에 붙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에 혹시 감독과의 만남 같은 행사에서 기회가 생긴다면 질문해야겠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극한직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작가의 책을 선물해 봐야지! 책을 받아 들고 바로 ‘테드 창!’이라고 외치며 웃음이 터지는 나 같은 사람이 분명 또 있을 것이다.
작가의 대표작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먼저 읽었는데 사실 내 취향의 책은 아니었다. 단편소설 여덟 편 중 〈네 인생의 이야기〉가 제일 흥미로웠다. 영화〈컨택트〉의 원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지구에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 ‘헵타포드’와 소통하기 위해 언어학자인 주인공이 물리학자와 팀을 이뤄 그들의 언어를 연구하고 습득하며 겪은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면서 시작한다.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 논 제로섬 게임, 미래를 보는 것과 자유의지와의 양립 가능성과 같은 물리학적 철학적 개념을 외계인의 언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버무려 놓은 느낌이랄까. 굉장히 난해하지만 완벽히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키는 묘한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극한직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SF소설을 즐겨 읽는지를 살짝 알아보고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또 다른 단편소설집인 ≪숨≫에도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