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십니까?
1975년 제4회 국민투표는 유신을 지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많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유신에 저항했지만 국민투표라는 이름아래 행해진 불투명한 투표는 미약한 저항 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영화는 군대 신체검사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지금과 다르게 당시에는 군대를 가는 것이 퍽 자랑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본인의 남성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방편인 것 처럼 느껴졌다. 장발 단속과 함께 나오는 ‘왜불러’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더 잘 보여준다. 대학생들의 음주문화와 술집 사장님과 대학생의 관계성은 파편화되기 이전 우리 사회를 잘 보여준다. 영자가 입고 있던 옷 스타일과 데이트 문화를 통해 대학생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이 영화가 자전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분명 반 독재를 위한 영화였고 수많은 부분이 잘려 나갔다. 그 중에서 나오는 영철은 감독이 자신을 혐오하며 비춘 모습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시험 탈락, 고등학교 시험 탈락, 대학교는 아버지의 돈으로 입학한 영철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담배 묘기인 거북선 밖에 없었다. 75년에 대학교를 입학했다면 고교평준화 이전에 고등학교를 진학했을 것이고 아슬아슬하게 중학교 평준화에 걸쳐서 중학교를 갔을 것이다. 즉 정치의 담론을 개인의 교육으로 전가하던 시기였다. 영철은 분명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사람이었다. 영철은 순자를 사랑하고 순자는 영철을 거부한다. 와중에 나오는 “이 자전거는 제 자동차입니다”라는 말은 너무 철학과 같은 발상이라 웃음이 났다.영철은 시위(영화에서는 검열로 인해 야구로 대체되었다.)에 나가는 학생 중 하나였고 ‘고래’를 잡고 싶어했다. 영철의 마지막 대사인 “고래는 동해바다에도 있지만 내 마음에도 있기도 해 지금까지 나는 그걸 몰랐었어 나는 지금부터 그것을 잡으러 갈 꺼야 난 용기를 보여주겠어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오늘의 나를 지탱할 수가 없어”는 희망찬 말로 보인다. 하지만 이 대사 후 영철은 자살한다. 그의 자살은 바꿀 수 없는 부조리를 모두 속에 담고 가는 숙명론적 자살이다. 연출가는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참담함을 영철의 죽음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병태와 영자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병태와 영자의 괴리감은 매력적이다. 병태는 현실과 이상속에서 고민하는 사람이다. 다른 친구들이 시위를 하러 갈 때 병태는 강의실을 지킨다. 그럼에도 올바른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가진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영철과 병태의 대화가 나레이션으로 나오면서 대학교는 무기한 휴강에 들어가고 병태가 텅 빈 교정을 걷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경거망동하지 않는 사람이 끝까지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이다. 영자는 ‘현실’의 사람이다. 당시의 여성관에 딱 걸맞은 사람이다. 병태는 그러한 영자를 사랑하기에 즉 ‘현실’을 사랑하기에 이상과 현실에서 고민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것이 감독이 품고 있던 생각을 은유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하게 혁명을 주장하기엔, 지금의 현실이 가진 아름다움도 간과할 수 없었다. 왜 영철은 병태에게 학교에 남아있으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바다에 몸을 던졌을까? 왜 병태에게는 학교로 가라고 이야기했을까? 결국 그 시대에서 저항할 수 있던 주체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을 통해 변화한다고 이야기 하고싶었던 것 같다.텅빈 교정에서 나오는 ‘들리십니까?’ 의 반복적 절규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관객들에게 닿길 바라는 감독의 외침이라고 느껴진다. 이 영화는 잘려버려 파편적으로 또 단순한 하이틴 영화로써 관객들에게 상영되지만, 한 명의 관객이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길 바라지 않았을까? ‘들리십니까?’는 사회, 부조리, 관객 모두에게 던지는 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