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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Mar 15. 2022

세상 모든 이야기의 시작

나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망치로 한 대 내려치는 듯한, 부조리의 고전다운 충격적인 시작이다.


또 어떤 그림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에 게으른 아이가 살았어. 어찌나 게으른지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싸고,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싸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권문희, 『줄줄이 꿴 호랑이』        



 댕기머리를 한 아이가 방 한가운데 벌러덩 드러누워 있고, 윗목에는 먹고 난 밥상이, 아랫목에는 오강이 능청맞게 그려져있다. 밥상 위에도, 오강 위에도 파리가 들끓는 걸로 보아 파리들이 밥상과 오강을 수시로 오가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게으른 아이가 거지가 되거나 소로 변하는게 아니라,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 살았대’라는 반전해피엔딩을 생각하면 너무도 사랑스러운 시작이다.  


 시트콤의 레전드, <프렌즈>의 시작은 어떤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지트 센트럴 퍼크 카페에 모여 앉아 행아웃 하고 있는 친구들. 이혼 후 절망에 빠진 로스를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싱글의 장점을 나열하자 로스가 울먹이며 외친다.

“난 싱글이 되고 싶지 않아. 난 그저 다시 결혼하고 싶을 뿐이라구!”

그 때, 결혼식장에서 갓 도망쳐 나온 신부, 레이철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두리번거리며 등장한다. 악동 챈들러가 재치있게 이어 받는다.  

“난 그저 백만달러를 원한다구!”


 다들 어쩜 이렇게 시작을 잘하는지!

어릴 때부터, 책이건 드라마건, 술 취한 선배의 사랑 이야기건, 이야기라면 늘 속절없이 매료되곤 했다. 언제부턴가 나도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언제나 시작이 어려웠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수백 수만가지 방법 중, 하나를 고르지 못해 여태 작품 하나 없는 만년 문학소녀, 아니 만년 문학아줌마이며 머지않아 만년 문학할머니가 될 예정이다. 하지만 오늘은 기여이 시작하고 말리라. 초라하고 볼품없는 시작이어도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오늘은 시작해야 한다. 시작조차 하지 않으면 늘 제자리, 모험도, 배움도, 성장도 없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멋진 시작을 빌려, 이렇게 용기 내어 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호랑이를 마주칠 수 있으니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몸 속 장기를 잘 보전해서 돌아오라는 남편의 진지한 당부를 뒤로 하고 드디어,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도, 연길 조양천 공항에 도착했다. 복잡하고 어수선한 코로나 관련 절차를 모두 마치고 조그마한 공항을 빠져 나오니 아, 파랗게 열린 하늘, 사방이 하얀 눈과 얼음이다. 그렇게 연변의 한국학교 교사로 파견된, 나의 연변연가(延边恋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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