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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Apr 13. 2022

하마터면 홍루몽도 모르고 죽을 뻔했다

조설근의 《홍루몽》을 읽다, 보다

중국 4대 고전장편소설, 《홍루몽》,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 중 중국인의 실제 일상생활이 담긴 《홍루몽》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왕멍
중국은 땅이 넓고 물자는 적으며 인구는 많고 역사는 유구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홍루몽》이 있다.  -마오쩌둥
《홍루몽》 출현 이후 전통적 사상과 작법은 모두 타파되었다. -루쉰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250년 전 쓰인 고전소설에 이런 찬사가 쏟아지는 걸까? 《홍루몽》을 읽고 나니 과연, 이렇게 재미있고 아름답고 쓸쓸하고 세련된 이야기를 모르고 죽었으면 얼마나 아쉬웠을까 아찔했다.


1. 치정(痴情), 가보옥


중국의 조물주 여와가 36501개의 돌로 하늘 구멍을 다 막고 마지막 1개의 돌이 남았다. 그 잉여(多余)의 돌이 저 높은 천공에 박혀 있지 않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 속세를 경험하는데, 그렇게 명문세가 가부(贾府)에서 옥을 입에 물고 태어난 남자아이, 이 옥수저가  바로 주인공 가보옥(贾宝玉)이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누나들, 하녀들, 형수님 등 여자들에 둘러 싸여 자란 보옥은 돌잡이에서도 책이나 활 대신 연지나 분갑을 집었을 정도로 여자들에 관심이 많은, 치정(痴情), 타고난 사랑꾼이다.


보옥은 여자 아이들을 좋아하고 여자들의 삶에 관심이 많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삶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향해 열린 마음이다
 -《대중지성 홍루몽과 만나다》 중


그는 무서운 아버지가 강요하는, 사서삼경을 외워 과거에 합격해 가문을 빛내는 정규 엘리트 코스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시 짓기, 미소년과 어린 떠돌이 배우들, 여자들의 몸에서 나는 향기, 땋은 머리, 하얀 목덜미나 풍만한 팔뚝, 빨개지는 귓불, 쉽게 토라지는 연약한 마음, 지는 꽃, 눈물 등이 그의 관심을 끈다. 그는 소위, 천하제일무능남(天下无能第一)인 것이다. 간혹 이런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사소하지만 아름답고 약한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소유나 경쟁, 권력, 성공, 미래에는 관심 없고, 그저 오늘 하루가 만족스럽고 스스로 행복한 사람들. 그래서 늘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시대 부적응자, 한량, 백수, 루저 혹은 시인이라고 부른다. 시대의 압박에 점점 위축되고 밀려나는 그들처럼, 보옥도 결국은 정신이상자가 되고 출가(出家)한다.  

홍루몽의 마지막 장면, 출가하는 보옥


2. 대옥이냐 보채냐, 이상이냐 현실이냐


대나무 임대옥, 모란 설보채

대나무와 부용화로 상징되는 임대옥(林黛玉)은 군자의 품격과 순수한 열정, 탁월한 시적 재능을 지녔지만 병약하고 눈물 많은, 보옥의 고종사촌이다. 둘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낯익은 끌림을 느낀, 운명적 지기(知己), 소울메이트(心灵之交)지만 봉건사회라는 굴레 속에 이들의 사랑은 결국 비극이 된다.


우연히 보옥과 보채의 혼인 소식을 전해 들은 대옥. 정신이 혼미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꼭 물어볼 것이 있다며 아픈 몸을 이끌고 기어이 보옥을 찾아간다. 넋이 나가 앉아있는 보옥. 대옥은 보옥 옆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더니, “보옥, 왜 병이 났어?” 하고 묻는다. 보옥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한다. “대옥이를 위해서 병이 났지.” 둘은 그저 마주 보며 미소 짓는다. 그뿐이었다. 대옥은 아까보다는 가벼워진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동안 썼던 시를 다 태우고 보옥과 보채의 결혼식 전날 밤, 절망과 눈물 속에 죽는다.



《보바리 부인》을 쓴 플로베르가 주인공 보바리 부인이 바로 작가 자신의 투영이라고 했듯, 작가 조설근의 모습이 가장 많이 투영된 인물이 바로 임대옥이라고 한다. 평생을 천상의 존재(보옥) 혹은 예술적 이상을 추구했지만 결국은 자기 연민과 불운 속에 비극적으로 죽어가는 존재, 과연 작가의 불행했던 실제 삶이 오버랩되는 듯하다.


한편, 모란꽃으로 상징되는 설보채(薛宝钗)는 건강하고 화려한 미모에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지혜로운 일등 며느리 감이다. 찡찡한 성격으로 주변의 미움을 사던 옥과는 대조적인 원만하고 너그러운 성을 지녀, 여러 사람들의 신임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보채는 보옥과 대옥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지만 집안 어른들의 결정에 순종, 보옥과 혼인한다. 그리고 보옥이 출가하자, 뱃속의 아이와 함께 풍비박산 난 집안의 종신 과부로 남겨진다. 그녀 역시, 사랑의 승자가 아닌 봉건사회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홍루몽 속, 아름답고 총명하고 선량했던 12명 여인들의 운명이 모두 서글프지만, 대옥과 청문 이야기만이 노래극으로 남아 여태 전해지고 있다고 하니, 중국 민중은 결국, 현실보다는 이상을, 도덕보다는 사랑을, 정의보다는 연민을 선택한 듯하다.


3. 무상(无常)한 , 끊을 수 없는 정(情)


홍루몽에는 권세가의 흥망성쇠라는 큰 무상의 흐름 속에, 일상 속 정겨운 풍경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왕의 귀비가 친히 집 안까지 행차하고 며느리의 장례식에 조문객이 인산인해를 이루던 그 휘황찬란 가문은 결국 온갖 악행과 부정으로 무너져 내리고, 청춘들의 낙원이던 대관원(大观园)은 이제 귀신이 출몰하는 폐허가 되었다. 그 아름답던 여인들은 죽거나 억척 아줌마가 되었고, 철부지 사랑꾼 도련님은 어른이 되기 전에 속세를 버리고 떠났다. 인생이 이렇게 덧없는 비극이라면, 어차피 다 죽고 사라질 것들이라면,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여느 때처럼 보옥이 여자 아이들에 둘러싸여 연을 날리고 있다. 보옥의 연이 하늘 높이 날자 보옥이 연줄을 끊어준다. 연은 더욱 멀어져 달걀만 해지더니 이제는 콩알 만해 졌다. 보옥이 대옥에게 말한다. “길거리에 떨어져 아이들이 주워가면 다행인데... 혹시라도 허허벌판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외딴 산골짜기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혼자 얼마나 쓸쓸할까? 안 되겠어. 같이 날아갈 연을 얼른 날려줘야지.”



홍루몽을 읽다 보면 어느새 알게 된다. 우리가 서로에 대한 정으로 살아감을, 서로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살아감을. 그래서 연약한 삶에 전히 의미가 있음을.  


4. 드라마 홍루몽


성과 이름, 캐릭터가 있는 등장인물만 721여 명, 지금까지 22개 국어로 번역 출간, 홍루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홍학(红学)’이 있을 정도로, 홍루몽은 문학작품을 넘어 ‘쇠퇴하지 않는 문화 현상’으로, 중국 국민 최애 콘텐츠로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다. 어린이용 만화, 드라마나 영화화된 작품도 많은데, 나는 가장 최근작인, 2010년판 드라마 홍루몽을 보았다(1987년판 드라마 홍루몽이 레전드라고 한다). 흥미로웠던 건, 당시 10대 혹은 20대 초반이었을 젊은 배우들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청소년 보옥 역을 맡았던 양양, 어린 보채 역을 맡았던 리신, 하녀 역 양미, 첩 역할 쏭이, 조그만 단역이었던 황쉬안, 자오리잉 등은 탄탄한 연기력과 성실함을 갖춘 대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무상함이 주제인 홍루몽이라서 일까, 당시에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을, 어린 가보옥과 임대옥을 연기했던 두 주연 배우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인간사 무상하고 중국 연예계는 더 무상하다.


하녀 청문역을 맡았던 양미, 지금은 중국 드라마 시청률 퀸
청소년 보옥 역을 맡았던 양양, 지금은 국보급 미남 배우로 활약 중

청춘과 연애가 다 지나 사십 대가 된 이제야 《홍루몽》을 처음 접하게 되어 안타깝다. 그래도 갱년기가 시작되기 전에, 노안전에 읽은 게 어디냐며 스스로 위안 삼는다. 비전공자의 축약 편역 본을 읽어 아쉽다. 한국에 가면 전공자의 정식 번역본, 홍학 학자의 이론서 등을 찾아 좀 더 깊이 읽어보고 싶다. 곁에 두고 여러 번 읽으며 함께 늙어가고 싶은 책이다.


*참고자료

-<曹雪芹与红楼梦>1~6集, CCTV9, 2021.

-<王蒙讲红楼梦>80集全, YOUKU,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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