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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Jan 01. 2023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중국예능 <무한초월반 无限超越班>을 보다


중국에 살면서 현지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즐겨보지만 예능 프로그램은 전혀 보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성룡이 직접 후배 연기자 액션 연기를 지도하는 예고편을 보다. ' 역시, 대륙의 스케일은 다르구나!' 감탄하며 이 예능을 보게 됐다. 매회 논란이 이는 바로 그 예능, <무한초월반  无限超越班>



일반인이나 배우 지망생이 아닌, 현업 '중고신인' 연기자들이 출연해 연기를 배우고 평가받는 예능.


데뷔한 지 이미 6,7년 된 배우들, 심지어 아역부터 시작해 연기 경력이 10년 넘 배우들. 톱스타는 아니어도 주인공도  맡았고, 연기력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배우들. 하지만 대표작, 성공작이라고는 데뷔 작품 밖에 없는 배우들. 늘 데뷔작에서 맡았던 비슷비슷한 역만 반복하며 점차 소모되어 온 배우들. 화려한 데뷔 이래, 줄곧 내리막길만 걷다가 곧 흔적 없이 사라질 배우들. 어딘가에 갇혀 길 잃은 배우들. 돌파구가 필요한 배우들, 다시 시작하고 싶은 배우들, 대체로 비호감이지만 본인은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는 배우들이 모였다. (개중에 연기경력이 전무한 신인배우, 경력이 살짝 오르막인 배우도 있긴 하다.) 이들을, 왕년 홍콩 영화, 드라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원로 배우, 감독, 제작자들이 멘토링해나가는 컨셉이다.


여기에 출연한 '딱한 배우' 몇 명을 들여다보자.  


홍콩출신 가수이자 배우, 설개기(薛凯琪). '홍콩의 마지막 소녀 배우' 라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다.


설개기가 멘토들 앞에서 자기 소개하기 미션 수행 중


아름답고 늘씬한 외모로 꽤나 핫했던 10대와 20대가 지나고, 우울증을 앓으며 작품 활동이 뜸했던 30대도 지나고, 아직도 소녀의 외모를 간직한 그녀의 나이는 어느덧 41세. 이제 그녀는, 나이에 맞지 않는 외모와 연기 스타일을 가진, 아무도 찾지 않는 '늙은 소녀 배우'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나이와 소녀 이미지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 중인 멘토들


"내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고 싶군요. 나도 38세 때 갑자기, 찍을 작품이 없었어요. 5년간 우울증을 앓으며 자살시도까지 했었죠...  그때가 바로, 아가씨 역도 엄마 역도 맡을 수 없는, 여배우의 '곤란기(尴尬期)' 였던 거예요. 지금 당신도 그럴 것 같군요... 당신의 그 고착된 '소녀 이미지'가 바로 당신이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비인 것 같아요. 지금 그 고비를 넘지 못하면 배우로서의 당신의 기회는 갈수록 줄어들 거예요. 꼭 내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말해주고 싶어요. 당신은 가능해요. 저도 해냈으니까요. 잘못된 방향으로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요. 41세, 51세, 61세에도 변하지 못하면 당신은 (배우로서) 그냥 끝나는 거예요."


설개기의 나이에 맞지 않는 닭살 스타일을 흉내내는 멘토


"매 연령마다 있어야 할 분위기란 게 있어요. 41세에도 소녀처럼 옷 입고 화장하고 '응~' 이러고 있으면 안 되죠. 41세가 가져야 할 성숙한 분위기가 있어야 해요. 그게 그 나이의 장점이에요..."


"그녀는 자신을 어 보이게 려고 일부러 가장한 적이 없어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편하게 드러낸 거죠. 스스로가 자연스러우면 된 거 아닌가요?"


"사생활 영역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일이라는 게 그렇지가 않아요. 하나의 이미지에 고착돼버리면 일이 들어오지 않아요."


"지금은 극의 종류도 필요한 연기자의 나이도 다양해요. 일단은 흘러가는 대로 둡시다."


그녀의 나이와 인형얼굴(娃娃脸)에 관한 멘토들 간의 열띤 공방 이어졌다. 놀라운 건 아슬아슬 인신공격 같은 멘토링 앞에서도 담담하고 긍정적인 그녀의 태도였다.


"제 나이에 대해서 많은 선생님들께서 이렇게 오랫동안 열띠게 토론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우리 배우들은 얼마나 예쁘든, 얼마나 젊든 간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 인생을 대면할지에 관한 저의 첫 번째 원칙은 (제가 되고 싶은) 여자가 되는 거예요. 배우배우라는 직업이 전부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그녀는 그녀 특유의 쾌활하면서도 성숙한 면모를 드러내며 '극호감'의 반전을 이뤄냈다. 그녀 말대로, 어려움과 난관 속에도 나름의 점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햇살청순녀, 심월(月).

'하늘이 밥 먹고 살라고 하사했다는(老天爷赏赐给他饭吃)'이 사랑스러운 얼굴의 그녀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이 있었으니. 벌써 데뷔 6년 ,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데뷔작 <치아문단순적미호 致我单纯的>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 채 캔디걸(甜姐) 역할만 내리 반복하며 완만한 내리막길을 걷고 있 중이었다.


그녀의 데뷔작이자 대표작 <치아문단순적소미호>, 2017년작
무대 위에서 너무 떨려 울먹이는 심월

 

타인에게는 너무도 명백한 문제가 정작 본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법, 그녀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첫 면접 자리에서 6년 경력의 중견 배우로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 떨려 감정 조절이 안된다 그녀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매번 미션이 끝날 때면 멘토들이 평가하기도 전에 벌써 눈 그렁그렁, "잘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더 배워야 해요." 라 낮은 자존감을 과시했다. 이쯤 되면 겸손이 아니라 '저를 밟아주십쇼'하는 습관적 자기 학대였다.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어쩜 저럴 수 있지? 네 엄마 누구시니? 딸을 왜 일케 키우신 거니? 묻고 싶은, 참 안타까운 그녀였다. 연예계에서 끝까지 살아남게 하는 건, 정말이지 미모가 아니었다.


잘하지 못해서 또 울먹울먹. 어쩜 , 연기에 방해가 되는 저런 가발을 쓰도록 본인을 방치할 수 있는 걸까, 그녀의 문제는 심각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던 조앵자(赵樱子).


멘토들 앞에서 자신의 미모와 연기력을 한껏 자랑하는 조앵자


"한 팬이 저에게 '디미맹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어요. 바로 리러바, , 자의, 구리나를 합친 말이죠. 이 별명이 참 마음에 들어요."


자신을 당대 중국 미녀배우 4명의 믹스판으로 당당 소개하는 그녀. 멘토들의 표정이 뜨악해진다.



그건 자랑이 아니라 모욕인 것 같은데요.

그녀의 '얕음'이 드러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멘토와 함께 진행할 작품의 캐스팅을 하는 시간. ' 많이 해 보아서 가장  할 수 있는 캐릭터라 이 역할을 맡고 싶다'는 그녀. 결국 그 역할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악역이라 이 역할에 도전해 보고 싶다' 영리한 지원 동기를 밝힌 다른 배우에게 돌아갔다. 그런 식으로 매번 모든 역할이 그녀를 빗갔고 결국 그녀는 어떤 멘토의 선택도 받지 못했다. 텅 빈 스튜디오에 홀로 남겨져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마는 그녀. 아무리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평범한듯 얌전히 앉아있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반드시 까발려지고 솎아이렇게 치욕을 당하고야 만다.  


난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전 연기는 잘하지만 말은 잘 못해요. 그래서 늘 이렇게 손해를 보죠. 그렇게 노력했는데 아무도 내게 기회를 주지 않는군요...  


어떤 작품에도 캐스팅 되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조앵자

아무리 설정이라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마는 현실의 민낯, 잔인함 어색함, 뼈 속 깊은 어리석음과 나약함. 쇼와 현실의 조마조마한 줄다리기. 원래 예능을 보지 않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람들이 예능에 중독되는구나 싶다.


갇혀 있는데 출구를 찾지 못해 쩔쩔매는 배우들의 모습이 왠지 내 모습 같다. 얼마나 많이 가지고 태어났든, 얼마나 운이 좋든, 결국 삶은, 태도의 문제라는 깨음도 얻는다. 나는 어디에 갇혀있는 걸까, 타인에게는 너무도 명백한데 내게만 보이지 않는 내 문제점 뭘까,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나도 알고 싶다. 앞으로 진행될 회차에서 이들이 과연 자신의 한계를 빠져나올 수 있지, 어떻게  빠져나올지 흥미롭게 지켜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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