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천우 Apr 26. 2022

줄거리, 결말을 다 알아도 재밌다

중드 <산하월명 山河月明>을 보다

이 드라마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한 왕조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고 무엇보다, 위기와 실패를 기회 삼아 운명을 이겨낸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를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봉지 북평(北平, 베이징)을 다스리는 연왕(燕王)에 봉해짐. 태자 주표가 병으로 죽고 그의 장자 주윤문이 2대 황제가 되자, 북평에서 세력을 키워 4년간의 내전 끝에 황제가 됨(정난의 변). 남경에서 북평으로 천도 단행.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다섯 번에 걸쳐 몽골을 정벌했고 안남(베트남)을 정벌하는 등 남북 변방의 수비를 공고하게 함. 대운하 정돈, 영락 대전을 편찬하고 황제의 독재권을 강화함. 정화의 해외 원정을 통해 대외교류를 강화함. 그의 재위 기간에 명나라는 전성기를 누렸으나 해외 원정과 대규모 공사로 인한 막대한 물적 · 인적 소모는 그 뒤 명을 피폐하게 하는 원인이 됨.          -네이버지식백과 참고


이처럼 드라마를 보기도 전에 드라마의 줄거리와 결말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토록 전성기를 누렸던 그의 왕조가 몇 대 지나 처참하게 멸망하리라는 것도, 그의 일생의 업적 대부분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거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딱딱한 역사 기록 사이에 개연성 있는 상상으로 채워 넣은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분투, 무엇보다 다른 인물들과의 찐한 갈등과 연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승자의 역사 혹은 사후 정당화일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의 해석에는 여러 버전이 있고 어차피 디테일한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1. 명나라 태조 주원장, 개국군주 혹은 아버지


그는 한족부흥과 민생안정을 기치로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세웠다. 그 자신이 가난하고 헐벗었던 평민 출신이기에 그는 백성들의 고통, 원나라의 폐망 원인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제 그는 모든 개국 군주가 직면하는 물음 앞에 서 있다. 개국공신들의 횡포를 눈감아주고 앞선 왕조가 갔던 부패와 패망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개국공신들을 척결하고 민심을 얻어 강성한 새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가. 지난날 이상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전장을 누볐던 동지들, 형제들, 그는 고뇌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골적인 변절과 나라를 좀먹는 부정 행태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이때 그가 이용한 것은 그의 든든한 아들들, 특히 넷째 연왕에게 관리감찰기구인 금의위를 맡긴다. 무수한 개국공신들이 역모와 부정에 연루되어 숙청되고, 이제는 지난날의 승리를 함께 이야기할 옛 형제도 몇 명 남지 않게 된다.


너희 썩어빠진 개국공신들을 몰아내고 백성들과 천하를 함께 하겠다, 이에 개국공신 수장 이선창이 외친다, 독한 놈! 독한 놈! 독한 놈!
죽은 큰 아들을 앞에 두고 슬퍼하는 아버지 주원장

황제 독점권이 강화됨에 따라 민생도 점차 안정되어 천도(迁都) 계획을 세워가던 어느 날, 믿음직한 조력자였던 큰아들 태자가 갑자기 병으로 죽는다. 이를 슬퍼할 새도 없이, 아버지에 앞서 왕이었기에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왕위 계승문제를 정리한다.


유능한 아들이냐 불쌍한 손자냐, 누구를 태자로 세울 것인가

“여기서 보이는 저곳이 산릉이다. 그곳에 내 아내를 묻었는데, 이제 태자까지 묻게 될 줄이야.... 너는 한 달간 승천문 앞에 꿇어앉아있었다. 반 시진을 줄 테니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아라.”

“신하 철현, 황장손을 황태손으로 옹립해주시기를 간곡히 청하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황장손은 유덕하고 창창한 나이이며 선(先) 태자의 장자입니다. 아버지의 지위를 장자가 이어받는 것이 예에 맞습니다. 연왕은 능력이 출중하긴 하나 전하의 4 황자로 연왕을 태자로 세우게 되면, 2 황자, 3 황자는 어찌하겠습니까.”

“이미 수백 번도 더 들은 이야기다. 내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해라.”

“선 태자는 근 30년 동안 태자 직위에 있으며 홍무 10년부터는 전하를 도와 각종 국사를 직접 운영해왔습니다. 과거제를 다시 시행하면서 조정 신임 관료의 대부분을 태자께서 직접 발탁하셨습니다. 이들이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황장손이 새로운 태자가 되면 연왕은 명을 보존하겠지만, 연왕이 태자가 되면 선 태자의 후손들은 과연 명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진보국(陈宝国)이라는 노련한 배우가 냉철한 독재군주지만, 조강지처 호랑이 아내 앞에서는 꼼짝 못 하는 소탈한 남편, 주원장 역할을 멋지게 해냈다. 중국어를 잘 모르는 외국인인 나까지도 울려버린 그의 인간미와 카리스마 넘치는 쩐(真) 연기, 나는 어느새 이 멋진 중국 아재의 팬이 돼버렸다. 그는, 어린 미남 배우(小鲜肉)에 회의를 느낀 중국 시청자들 사이에서 요즘 불고 있는 ‘TOP STREAM UNCLES’, 아재열풍의 주역이기도 하다.


아재열풍의 주인공, 진보국 배우


2. 태자 주표, 혹은 큰 형

맞는 동생 보다 때리는 형이 더 많이 운다, 다꺼! 내가 잘못했어!

무서운 아버지 앞에서 늘 동생들 편을 들어주던 너그럽고 든든한 ‘다꺼(大哥)’, 주표. 특히 주체와의 사이가 각별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략적으로 하사한 정혼을 피해 맘대로 살고 싶다며 도망간 그를 형이 직접 매질한다. 아버지가 왕이고 형이 태자라서 너는 절대 그렇게 살 수 없다고, 그게 너의 운명이라고, 난창 번왕으로 당장 꺼지던지, 수도에서 혼인을 하고 아버지와 태자를 도와 명나라의 기틀을 세우던지 선택하라고. 그 말에 철부지 주체는 어른이 된다.


그토록 우애 깊던 큰형이 죽었지만 주체는 큰 형의 장례식은 물론 아버지 주원장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다. 권력투쟁이 첨예한 왕가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북원(北元)과 각종 북방 이민족에 맞서 충직하게 명나라를 지켜온 연왕, 이제 그의 높은 명성과 실력 때문에 더욱 위태로워진다.


3. 서달 장군, 사위를 리더로 단련


때리면서 사위 단련

그는 명나라 3대 개국공신 중 하나로, 북평을 근거지 삼아 오랜 세월 북방 이민족들에 맞서 명나라를 지켜왔다. 대대적인 개국공신 숙청에도 그가 살아남은 이유는, 자기 본분을 잘 알고 군신의 예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금지옥엽 장녀 묘운과 똘끼 4 황자와의 정혼을 처음에는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곧 연왕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그를 군심을 얻는 진정한 리더, 유능한 북평의 주인으로 단련한다.


영화 <패왕별희>에서 별희장국영이 사랑했던 패왕, 바로 그 배우다. 예순이 넘었을 텐데 어쩜 저렇게 눈빛과 목소리, 몸짓까지 멋진 걸까. 오! 이 배우는 퇴장하는 순간까지 멋지다.


죽음 앞에서도 충언을 잊지 않는 서달 장군

“무슨 일이야. 이제 너도 나 먼저 가려고?”

“전하, 제가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어찌 전하를 두고 가겠습니까, 흐흐흑...”

“울지 마, 울지 마, 우리 울지 말자.”

“예, 안 울겠습니다, 안 울겠습니다....우춘이 죽을 때 39세였지요. 문충은 좀 더 오래 살아 45세에 죽었지요. 저는 이제 50이 넘었답니다. 하늘님이 제 체면은 세워주신 셈이지요. 우춘, 문충 우리 세 명은 서로 실력이 막상막하지요. 제가 그쪽으로 넘어가면 그 두 명을 불러 한판 붙어 반드시 전하의 체면을 세워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하루속히 군사를 일으켜 북벌하십시오.”

“북벌이라고?”

“군사를 일으킬 기회는 한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북원은 물과 풀을 쫓아 사는 사람들로 정해진 거처가 없어 종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 내란의 기회를 이용하지 않으면 다시 힘을 길러 반드시 몇 년 안에 자기들끼리의 세력 다툼 중에 다시 출중한 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천하호걸일 것입니다. 전하, 다시는 그자들에게서 영웅이 나오게 해서는 안됩니다.”  


4. 주체, 연왕에서 영락제로


선 태자의 장자 주윤문은 황제로 등극하자, “삼촌네들을 괴롭히지 마라.”라는 주원장의 유언과는 반대로, 가장 먼저 삼촌 번왕들을 겨눈다. 그들의 녹봉을 삭감하고, 군사권을 축소하고 죄인으로 만들며 각종 압박을 가한다. 건문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연왕, 그 역시 가족이 인질로 남경에 끌려가도 참고, 한여름에 군불을 때며 미친 척도 해 보지만, 독점 권력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미친척 하기

마침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30년 동안 일궈온 북평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연왕. 조정의 군대는 50만, 연왕의 군대는 8만, 조정은 서달 장군의 장남이자 연왕의 처남인 위국공까지 내세워 연왕을 치게 할 생각이다.  


전하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 다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남동생이 잡히거든, 그의 목숨만은 꼭 살려주십시오.”

“왕비는 어찌 내가 이번에 이길 거라 생각하오?”

“전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겨우 몇 만의 병사로 천하와 싸우는데 사실, 반드시 이길 자신은 없소.... 부황께서 태자와 나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소. 당시, 전투에서 지게 되면 이선창 등 다른 이들은 투항하여 살 수 있지만 대장이었던 부황은 죽는 길 밖에 없었다 하셨소. 투항해도 죽고 도망가도 죽고 싸워도 죽는다면 죽을힘을 다해 싸워보고나 죽자는 생각이었다 하셨소.”

“그토록 결의가 굳으신 부황께서도 그런 회의의 순간이 있으셨는데 전하라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 연번(燕藩)의 땅, 백성, 군사력이 조정의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하겠지만 제가 보기에 전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두 명뿐입니다. 한 분은 선 태자이시고, 다른 한분은 부황이십니다. 이 두 분 외에는 전하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책사인 승려 도연이 묻는다.

“저 쪽은 50만 병력입니다. 어찌 이리 이길 거라 자신하십니까?”

“책사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왕비 말고는 내가 이길 거라 믿는 자가 한 명도 없기 때문이오.”


그를 믿었던 단 한 사람, 그가 정혼을 두 번이나 퇴짜 놓았던 바로 그 왕비의 말대로, 결국 그가 이기고, 그는 명나라의 전성기를 연 영락제가 된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를 수도 남경이 아닌, 북경에 묻는다.


5. 그의 북경

     

어쩌면 운명을 이겨낸 사람은 없는지도 모른다. 왕의 장자로 태어난 덕분에 저절로 왕이 됐든, 죽도록 피 흘리고 싸워서 왕이 됐든, 어차피 죽어서 티끌이 되기 마찬가지니까. 사자 같은 기세를 지녔던 주체 역시 결국은 초원을 헤매다 보통 사람들처럼 늙고 병들어 죽는다. 하지만 그의 북평, 북경은 남았다. 그가 평생을 바쳐  단련되고 지켜내고 떨쳐 일어났던 북경, 황제가 된 후, 다시 돌아와 제국 번영의 중심지가 된 북경. ‘편안히 숨어 살겠다’는 남경이 아닌 북방 오랑캐든 운명이든 ‘당당히 맞서 싸우겠다’는 그의 포부가 담긴 북경. 북경에 가면 꼭 그를 생각하겠다. 결국 운명에 졌지만, 질 때 지더라도 크게 한번 붙어보고 진 그를 생각하겠다.

이전 10화 남자들의 판타지를 엿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