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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Oct 13. 2022

남자들의 판타지를 엿보다

김용 원작 <비호외전 飞狐外传>을 보다

(남주만 잘 생겼다면) 장르 가리지 않고 중국 드라마를 두루 즐겨 편이지만 강호무협만은 비선호다. 남자들이 <연애의 발견> 같은, 여주 중심 심쿵 삼각연애 드라마를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너무 황당하고(무림절대고수, 절대검법, 절대신검 등등) 너무 뻔하며 ( 부모의 복수, 권선징) 전혀 공감할 수 없기 때문( 예쁜 여자들이 왜  나대기 좋아하는 난한 애송이를 좋아하는 거지?)이다. 어릴 때부터 주변 사춘기 소년들(혹은 남자 어른들)이 '김소설'을 탐독하는 것을 많이 봐왔지만 전혀 관심도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심지어  등단에 실패한 한국 삼류 설가인 줄 알았다. 


아, 김용이 외국인이었다니!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전 세계 3억 독자를 가진, 대 소설가였다니! 거기다 이제 겨우 알았는데 이미 돌아가시고 없다니! 사십 대 아줌마가 된 이제야, 그 경이로운 강호 대협들의 세계를 다. 바로 얼마 전 중국에서 방영 끝낸, 기막히게 잘 만든 드라마 <비호외전> 덕분이다. 주인공 호비(胡斐)를 찰떡같이 연기한 진준걸 배우 덕분이기도 하다. 


1. 복수


주내용은 '소년 호비의 무림 성장기'라고 하지만, 성장하는 남자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비운의 무림고수, 면봉 아니고, 묘인봉. '의천도룡기 2019'에서 양소역을 맡아, 촉촉한 눈빛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소?' 하며 여심을 후벼 파던 바로 그 배우, 임우신이다.


그는 무림 제1고수다. 인품도 훌륭해 금면불(金面弗)이라고도 한다. 그가, 가족과 함께 여행하던 또 다른 무림 고수 호일도(胡一刀, 나쁜 놈을 보면 한 칼에 베어버린다고 해서 일도)를 만난다. 의협이던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알아보고 5일 밤낮을,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즐겁게 겨룬다. 마지막 날은 서로의 까지 바꿔가며 호기롭게 겨루그만, 호일도가 묘인봉의 칼에 살짝 베이고 만다. 그런데 그 칼에 누군가 몰래 독을 묻혀 놓아, 호일도와 호일도의 독을 입으로 빨아내던 호일도의 아내까지 죽고 만다. 두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묘인봉. 칼에 몰래 독을 발라놓은 원수를 찾기 위해 평생을 고독하게 헤맨다.



이때 두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혼자 남은 아기가 바로 호비다. 호비는 어려서부터 묘인봉을 원수로 알고 복수를 다짐, 떠돌이 고아로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 묘인봉에게 대적할 날위해 무술을 익혀나간다.


그리고, 운명처럼 묘인봉과 호비가 만난다. 첫 만남에서는 어린 호비가 다른 이의 야비한 계략에 빠진 묘인봉을 구해준다. 호비가 묘인봉의 적수가 될 만한 실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묘인봉이 죽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부상을 입고 강물에 떠내려온 어린 호비를 묘인봉이 구해준다. 호비는 묘인봉을 죽이겠다며 다짜고짜 달려들지만 그는 묘인봉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실력도 안되면서 꺄불어


 그리고 세 번째, 눈이 먼 묘인봉과 청년이 된 호비가 겨룬다. 묘인봉은 오랜 세월 소중히 간직해 온 호일도의 칼을 호비에게 건넨다.


네 부모의 죽음의 진상을 알고 싶은가?
그럼 그 칼로 나를 이겨라.
너의 호가도법(胡家刀法) 실력을
한번 보자꾸나.


이내 대결을 펼치는 두 사람. 20여 년 전, 하얀 설 산속에서 식음을 잊은 채, 서로 가르치 배우며 겨루었던 호일도와 묘인봉의 대결 장면과, 한 여름 초록 녹음 속에서, 호일도의 아들 호비와 앞이 보이지 않는 묘인봉이 다시금 가르치고 배우며 겨루는 장면이, 가슴 뜨겁게 겹쳐진다. 남자들은 그렇게, 서로 맹렬히 싸우며 친해지는 모양이었다. 결국 마지막 합에서 스스로 칼을 놓고 목을 들이대는 묘인봉.



내가, 젊은 날의 경솔함과 오만함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허명을 쫓아 그토록 어리석지 않았더라면
너의 부모님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네 부모를 죽인 원수는 바로 나다.
나를 죽여 네 부모의 원수를 갚아라.

호비는 차마, 묘인봉을 죽이지 못하고 눈물을 쏟는다.  


복수의 철학적 의미를 묻는, 멋진 장면이었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살인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니까 복수를 주저한다. 그 주저함이 결국은 우리를 구원한다.


이처럼 극 중에는 복수를 주저하 고뇌하는 인물들이 있고, 그 반대편에, 일말의 자기반성 없이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기계적인 복수를 실행하려는 인물들이 있다. 묘인봉을 죽이지 못하는 호비, 하녀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겁탈하고 내쫓았던 생부 풍천남을 증오하면서도 세 번이나 살려주는 원자의는 전자다. 반면, 야비한 인물이었던  남편의 죽음을 묘인봉 탓으로만 돌리며 복수에 집착하다 결국 자신의 생명과 아들의 미래까지 잃고 마는 상씨 부인, 자신의 악행을 만천하에 까발린 호비에게 되려 복수하려는 풍천남, 동거녀의 유산을 그녀의 전남편 묘인봉의 잘못으로 돌리며 잔인한 복수의 음모를 꾸미는 전귀농 등은 후자에 속한다.


성찰 없는 복수 중독자들, 풍천남(좌)과 전귀농(우)


하지만, 우리의 영웅 호비도 결국 복수의 덫에 걸리고 만다. 바로 여기에 헐리우드 히어로물과는 다른, 김용 이야기만의 깊이와 감동이 있다.


묘인봉은 진범이 아닌 데다 선한 인물이니까 그에 대한 복수 쉽게 접는다 쳐도, 악인은? 악인 중의 악인, 풍천남은 복수해도 되는가? 어차피 해충 같은 존재니까, 반성과 개선의 여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자니까 이 세상에서 없애주는 게 바로 선 아닌가? 그래서 호비도 그의 오랜 염원대로 풍천남을 죽인다. 풍천남의 손에 죽었던 무고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도합 6번, 그를 무참찔러 죽인다. 그렇게 복수를 완성한다.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다시 네 발을 쏘았다. 총알들은 깊이 들어가 박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여섯 번의 깊은 칼질. 이 모습을 풍천남의 숨겨진 사생아이자 호비가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 원자의가 조용히 흐느끼며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의 문 영원히 닫힌다.  


2. 여자


무림 제1고수 묘인봉의 아내로 사는 건 어떨까? 꽤 간지 날 것 같지만 실상은 반대다. 일단, 남편이 늘 집에 없다. 이리저리 복수를 주고 받으러 다니느라 바빠서 당최 집에 붙어있지를 않는다. 심지어 수년간 얼굴도 못 본다. 통신도 발달하지 않은 시대, 늘 벽지로만 떠도는 터라 생사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생계도 육아도 외로움도 기다림도 모두 아내 혼자 몫이다. 때로는 아내와 아이까지, 남편의 복수를 노리는 자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또 남편의 장기적 부재를 대신해 긴밀한 도움을 주는 다정한 이웃집 남자와 눈이라도 맞았다간 치명적인 복수를 감당해야만 한다. 이런 불행한 결혼 생활이 없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떠난다. 그것도 묘인봉의 사람 좋은 후배를 가장한 원수, 전귀농의 품으로.


총각 호비의 사정은 어떤가. 호비의 첫사랑, 뛰어난 무술 실력과 미모, 신중하고 당찬 성격, 천산파의 수제자 원자의. 호비가 약자들의 복수를 위해 그녀의 생부를 죽였고 숙명처럼 그녀는 비구니가 되었다. 두 번째 사랑, 호비 바라기, 만능 문제 해결사, 독수기 넘치는 마지막 제자, 정령소. 그녀 역시, 자신을 희생해 호비를 구하고 죽고 만다.


두 의협의 인품과 무공은 그토록 뛰어나건만, 애정생활 순탄치가 않다. 사랑은 많이 받으나 결실을 맺고 정착하지 못한다. 그래서 강호를 떠돈다.


첫사랑은 비구니, 두번째 사랑은 '오빠, 수염 기르고 다녀'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


3. 강호, (义) 추구


반정부 의협인들의 비밀 단체, '홍화회'를 소멸시키려는 청나라 정부의 계략으로 열린 장문인대회.


전국에서 몰려든 온갖 강호대협들이 토너먼트식으로 겨룬다. 조작된 승부, 온갖 협잡과 계략을 뚫고, 신분을 감춘 호비가 승승장구한다. 대망의 준결승전, 전귀농과 대결하는 호비. 전귀농은 20여 년 전, 깊은 열등감에 빠져, 묘인봉을 죽이기 위해 호일도의 칼에 치명적인 독을 발라았던 바로 그 범인이다. 전귀농은 이번 장문인 대회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때처럼 자신의 칼에 독을 발라놓았다. 이를 모르고 겨루다 전귀농의 칼에 베인 호비가 쓰러진다. '너희 부자(父子)가 모두 내 손에 죽는구나' 비아냥거리며 전귀농이 칼을 높이 들어 올리는 순간, 바람을 가르며 누군가가 날아온다.  




아, 묘인봉이다! 오빠 왜 일케 늦게왔쪄! 이때부터 통쾌한 '권선징악' 사이다 장면이 펼쳐진다. 몇 합 겨루지 않았는데도 벌써 밀리는 전귀농. 얼굴 비열함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지고 곧이어 그의 최후가 닥친다.


묘인봉이 공중으로 가뿐히 날아올라 주저 없이 칼을 내리꽂는다. 전귀농이 바닥에 나뒹군다. 다시, 묘인봉이 현란하게 돌아, 비틀비틀 일어서던 그의 가슴정면으로 '푹' 찌른다. 이어지참 교육.

지켜야 할 것은 도의요
 所守者道义


이미 들어간 칼을 더 깊게 밀어 넣으며

행동할 때는 충의요
所行者忠义


이미 들어간 칼이 등 뒤로 나오도록 끝까지 밀어 넣으며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명예와 절조다.
 所惜者名节


그리고 마지막, 몸을 관통 칼을 잽싸게 빼내며

이게 바로 강호다.
这才是江湖


전귀농의 피투성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울타리에 세워둔 창에 내리꽂힌다.


까발려진 음모, 이어지는 청나라 정예군의 총격, 대회에 참가한 강호 대협들이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한다.


현란한 놀림으로 총아내던 묘인봉이, 호비를 비롯한 강호 사람들을 방 안에 밀어놓고 밖에서 문을 닫는다. 겹쳐지는 20여 년 전 장면, 죽어가던 호일도의 아내가 묘인봉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아이를... 돌봐주세요..


묘인봉은 자신의 죽음으로 끝까지 의리를 지켰고 이제 그 의협의 자리를 호비가 이어받는다. 그래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설산비호 雪山飞狐


눈밭의 고독한 여우가 되어 강호를 떠돌 호비

총을 이기는 칼, 부와 권력을 뒤엎는 통쾌한 반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호의 순정한 의리를 생각하면, 이 아줌마의 가슴이 아직도 벌렁벌렁하다.


저마다의 가슴에 의협 하나씩을 품고, 강호 대신 빌딩 숲, 아스팔트 길에서, 오늘도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단하고 고독하지만 죽을 힘을 다해 분투하는 남자들이 살짝, 다르게 보인다. 리스펙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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