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천우 Sep 06. 2022

3천 원이면 족하다

직장 내 인간관계

'샘~잘 지내시죠? 핸폰 번호가 바뀌어서 중국 통장 로그인이 안돼요. 잔고 처리하니 부디 받아주세요~'라는 위챗 메시지와 함께 보내온 17元(약 3천 원).


2년 함께 근무하다 작년 겨울,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 귀국 K 선생님이다. 수학 교사임에도 자신의 손익 계산에 어둡고, 돈 욕심, 물욕, 심지어 식욕까지 없던, 선생님의 조용한 모습이 떠오른다. 나와 연배도 비슷하고 연길에서 혼자 지내는 상황도 비슷해 모아산이며 연길 시내 곳곳을 몇 시간이고 말없이 함께 걸어 다니곤  했었다. '선생님, 이번 주말 시간 되세요?' 물어보면, 언제나 '아~무일 없어요. 언~제든지 연락해요.' 하시던 선생님. 망의 화신인 나와 반대로, 고기도 커피도 화려한 디저트도, 잘 생긴 남자도 안 좋아하던 선생님. 작년, 그렇게 속상하고 억울한 일이 많았어도 하소연 한마디, 다른 사람 험담 한마디 않으시던 선생님. 작년 여름엔 둘이서 조촐하게, '열하일기' 속 청더 피서산장 다녀왔더랬다. 피서산장 안에서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나 황제의 정자에 나란히 앉아, 하얀 연꽃 가득 핀 연못 위로 하염없이 쏟아지 비를 홀린 듯 함께 바라보았다. "예전에 제가 사랑했던 남자가 연꽃을 좋아했거든요. 연꽃 볼 때마다, 참..." "사랑했던? 그럼, 결국 잘 안됐다는 얘기네, 참..."  실없이 나누었던 대화도 기억난다.



다시는 쓸 일 없을 중국 급여 통장에 마지막  잔액 17元을 두고,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게 보낼 생각을 하셨다는 사실에 왠지 뿌듯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평생을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단 하루도 함께 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사장님도 아닌 처지에 직장생활을 어디 그렇게 할 수가 있나. 혐오하는 인간이지만, 매일 얼굴을 맞대하고 퇴근 후 회식도 해야 한다. 웃는 낯으로 부탁도 해야 하고 그 사람이 결혼을 하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내 감정과는 별개로, 피 같은 돈도 각출해 내야 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아실현이나 생계를 위해 꾸역꾸역 모여 앉아, 자신의 책임과 이해관계를 위해 하루 종일 분투하는 곳. 그러기에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목적과 편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곳, 바로 직장이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타인을 물 취급하는 직장 사람들을 대할 때면 직장생활을 20년이나 했어도, 여전히 아프다.



람 좋다고 모두가 칭찬하는 부장님이 있었다. 늘 웃는 얼굴친절한 말투로 사람들을 대하고 무엇보다 부서원들에게 밥이나 커피를 잘 다. 하지만 부장인 그의 업무는 매년 줄어드는데 비해 부서원들의 업무는 늘어만 갔다. 관리자나 타부서원들과 심각한 문제가 생겨도 해결되지 않았다. 맡은 업무가 너무 버거워도 도움을 받 못하고 담당자 혼자 해결해야 했다. 왜냐 부장님은 절대 싸우지도, 도와주지도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교육적 신념이나 원칙을 위해, '노'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 사람, 늘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어물 슬쩍 넘어가는 사람, 진정으로 연민하거나 공감하거나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 기름칠만 잘할 줄 알지, 다른 사람들을 대표하고 책임 생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장에서 최악의 인간은 아니었지만 사람들 생각만큼 '훌륭한' 인간도 아니었다. 그가 사는 공짜 밥이나 커피는 그의 얕고 편안한 직장생활 위한 싸구려 뇌물일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빠지지 않고 잘도 얻어먹다.)


향원(乡愿)이란 더러운 세속에 몸을 담그고 탁한 세상과 호흡을 맞추어 살아간다. 그 처신하는 겉모습은 성실하고 신의가 있는 듯 보이고, 그 행동하는 겉모습도 청렴결백한 듯하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은 그를 좋아하고, 그 자신도 자기가 옳고 바른 사람인 양 여긴다. 그러나 이런 자들이야말로 도저히 요순의 도에 함께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니, 그래서 '덕을 해치는 자들'이라고 한 것이다.    -《맹자》 중에서


새로 부임한 후배가 있었다. 선배 교사들이 돌아가며, 중국 입국 기념으로 밥을 사고, 격리 해제 기념으로 고기를 사주고, 연길 시내를 구경시켜주며 디저트와 음료를 사고 또 체험학습을 무사히 다녀왔다고 짬뽕을 사고 한 학기를 무사히 끝냈다고 피자를 샀다. 일 년이 지나고, 열 번, 스무 번도 넘게 얻어먹었어도 그는 사탕 한 알, 커피 한 잔 돌려줄 줄을 모른다. 얻어먹을 때도 미안하고 불편한 기색이라곤 없다. 밥을 사는 것은 너의 사정일 뿐이다, 네가 밥을 산다면, 언제든 기꺼이 먹어는 주겠다는 심보다. 그가 그렇게 아낀 돈으로 주식투자를 하고, 아파트 청약을 몇 건이나 해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보다 더 돈은 없지만 마음이 모질지 못 사람들, 동료 간의 예의나 정감을 중요시했던 사람들이 그에게 줄곧 밥을 샀던 것이다.


직장에서 만난 이들 대부분은, 이곳 이때가 아니라면, 내 인생에서 굳이 다시 볼 일 없을 사람들이다. 나 역시 그들에게 그런 존재이리라.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지만, 서로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다 기한이 다하면 자동 소멸되는 팍하고 느슨한 관계. 서로 기대할 것도 실망할 것도 나눌 것도 간직할 것도 없는 그저 지나치는 메마르고 씁쓸한 관계. 


그래서인지 K 선생님이 내게 보내 3천 원이 더 깊이 와닿는다. 정말이지, 3천 원이면, 직장동료로 만나 우리가 잠시나마 나눴던 한 줌의 진심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K 선생님! 보내주신 귀한(!) 돈으로 지금 백리성 루이싱 커피 마시러 걸어가고 있어요. 감사해요! 다시 만나면 제가 최고로 맛있는 오자차 사드릴게요.' 라고 답장 메시지를 보낸다.




*참고자료

-이미지 출처, YOUKU, <平凡的荣耀>, 2020.

-배병삼, 논어, 사람의 길을 다》, 사계절, 2007. 261쪽








이전 13화 연근미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