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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Jun 27. 2022

닭다리남과 우리반 J는 억울하다

대드 <사랑은 3일 후에 발생 爱情发生在三天后>을 보다

작년, 초등 1학년 우리 반에 J라는 아이가 있다. 첫째 형은 고3, 둘째 형은 중3, J는 아들 3형제만 있는 집의 늦둥이 막내로, 온갖 귀여움을 받으며 해맑게 랐다. 그래서인지 멀쑥한 키와는 달리 말과 행동이 부쩍 느리고 엉성했다. 때때로 '내가 어제 무슨 게임한 줄 알아?'라며 교사 나에게 뜬금없이 반말 걸어왔다. 혼자서 계단을 잘 내려가지 못했고, 점심 급식을 5교시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먹곤 했다. 문장은 물론이고 받침 들어간 글자는 대부분 받아쓰지 못했고 친구들이 줄넘기 100개를 는 동안, 아무리 가르쳐도 줄넘기 한 개를 뛰어넘지 못했다. 딴짓을 하거나 돌아다니는 것도 아닌데 수업시간 내 과제를 다 마치지 못해 늘 쉬는 시간, 하교시간까지 끙끙대 했다. 특히 중국어 시간에는 더 심각했는데 한 학기 내내 한자는 한 글자도 익히지 못하고 원어민 교사가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거나 힘없이 엎드려 있기 일쑤였다. 혹시나 다른 인지적, 신체적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닌 조심스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날, 하교지도를 하면서 J와 단둘이 손을 맞잡고 교문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J 야, 오늘 중국어 시간에 중국어 선생님이 아프냐고 물어보셨는데 왜 대답하지 않았어?"

"......"

또 대답이 없다.

"어제 내 준 수학 숙제는 왜 안 해왔어? 가족들과 어디 다녀오느라 바빴던 거야?"

"......"

또 대답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초등 1학년 아이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유치원 카드'를 꺼낸다.

"초등학생은 묻는 말에 대답을 잘해야 된단다. 대답을 잘 못하는 아이는 아직 애기라서 그런 거니까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가 대답 잘하는 연습을 1년 더 하고 와야 해. 우리 J가 초등학생 형아답게 대답을 잘 못하니 아무래도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가야겠는걸. 친구들을 자주 때리는 우리 반 K 하고 같이 말이야. ”

'유치원 카드'와 'K'에 위기감을 느낀 J가 온몸의 용기를 끌어모아 개미 같은 소리로 겨우 대답한다.

"어, 어, 생각해보고 대답하려고......"



함박웃음이 예쁜 말괄량이 여학생 유죽, 꼼꼼하고 세심한 남학생 왕연. 둘은 대학 1학년 첫 수업에서 만나 4줄곧 절친으 지낸 사이다. 졸업 3일 전, 함께 간 콘서트에서 유죽은 오랫동안 키워온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레 꺼낸다.

"왕연, 너 나 좋아해?"

"응!"

"그럼... 나 사랑해?"

"......"

"......"

"나, 3일만 기다려줄 수 있어?"



왕연의 대답에 크게 실망한 유죽은 그 길로 돌아서 콘서트장을 나가버리고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그 어떤 작별인사도 없이 연락이 끊긴다. 그 후 8년이 지나 대학 동창회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왕연은 이미 결혼했고 유죽은 다정한 남친과 동거 중이다. 풀어내지 못한 오래전 감정으로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붉힌다. 어색했던 모임이 끝나고 다시 마주친 지하철 역, 그렇게 친한 사이였는데 어떻게 8년 동안이나 잠수탈 수 있냐고, 왕연이 오래 참았던 말을 내뱉는다. 녕유죽 역시 오랜 서운함과 서러움이 북받다. 


"졸업식 3일 전, 콘서트장에서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 안 나? 우 4년 동안이나 아침저녁으로 붙어 지내던 사이였어. 어떻게 나를 사랑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3일이 더 필요할 수가 있어?"

"사랑처럼 중요하고 엄숙한 일에 대해 3일은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생각? 사랑은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감정이지 사고해서 생기는 게 아니야. 사랑에 사고가 필요하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닌 거라고!"

"그래서 3일간 생각해보겠다고 해서 화 난 거야? 아님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화가 난 거야?"

"이건 존엄의 문제라고!"

"3일 생각해보겠다는 게 어떻게 너의 존엄을 헤치는 문제가 되는 거야?"


나를 사랑하는지 결정하는데 3일 필요하다던 그 남자를 물어뜯는다


감정이 격앙되며 서로 상처되는 말을 마구 내뱉는 두 사람, 돌연 유죽이 저녁밥으로 먹으려고 산 닭다리를 왕연에게 집어 던지며 그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그의 팔뚝을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이 '상어녀'와 '닭다리남' 동영상이 SNS에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며 둘은 더욱 곤경 처하는데...


처음 이 장면을 볼 때는, '저런 사이코패스 같은 놈!' 하며 남주를 욕했다. 여주의 서운한 마음이 너무 공감 돼 눈물도 났다. 하지만, 다시 보니 왕연과 우리 반 J가 겹쳐졌다. 순간의 감정에 충실해 사랑한다고 바로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있, 앞으로 100년간 상대방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겠는지 깊 생각해보고 '100년 사랑계획'을 꼼꼼히 세운 후에야 겨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냐고 물어보면 그 즉시 대답해야하는 걸까? 그 동안 보여준 애정과 배려의 행동이 바로 대답이 되지는 않는걸까? 다른 이의 몰이해와 오해 속에 왕연이 혼자 많이 억울했을 것 같다. 


언제나 느린 아이, 하지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끝까지 해내는 아이, 대충 얼버무리거나 거짓말을 못해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고 확신이 든 후에야 겨우 대답할 수 있는 아이. 돼지를 좋아해서 크면 농부가 되어 밭을 가꾸고 돼지를 키우고 싶는 아이, J.


나의 꿈 티셔츠, J 의 작품, 행복한 농부가 될거라는 예감이 든다.


놀랍게도 J는 작년 12월에 치른 기말 지필평가에서 수학 100점, 국어 98점을 받았다. 가장 부진인 줄 알았던 아이가, 시험 문제를 꼼꼼히 읽어보고 깊이 생각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거였다. 평소 J를 '느림보 거북이'라고 놀려대던 우리 반 까불이, 잘난척쟁이, '가짜 영재'들의 코가 납작해졌다. 그리고 나도, 결국은 거북이가 이긴다고, 우직한 사람이 산을 옮긴다 확신하게 되었다.



왕연도 그런 사람이지 싶다. 등굣길에  유죽의 자취방에 들러 그녀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함께 등교하던 왕연, 아침잠 많은 유죽이 늦을 때마다 그녀의 집 밖에서 "왕연! 빨리 나와, 왕연!"하고 녕유죽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소리쳐 르던 왕연, 그들만의 다정한 비밀. 토록 세심하게 배려하던 왕연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긋나 버린 두 사람의 사랑이 안타깝다. 하지만 드라마니까, 어떻게든 다시 길을 찾아가겠지.



매일 2편씩 척척 방영해주는 속전속결 중국 드라마와는 달리, 일주일에 단 2편밖에 방영해주지 않는, 우리 반 J를 닮은 느리속 깊은 대만 드라마, 다혈질 경상도 아줌마인 나는 조급증에 아주 말라죽을 지경이다. 총 24편인데 이제 겨우 4편 밖에 보지 못한 채로 이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쓴다. 무쪼록, 우리 J는 나중에 여친한테 물어뜯기지 말아야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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