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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May 21. 2022

교회 오빠는 못 말려

○태, ○훈, ○식, ○섭 오빠들, 잘 살고 있나요?

나는 교회 오빠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태어났다. 평소 대화라고는 "밥 묵자.",  화나셨을 땐 "마!"가 다인 무뚝뚝한 경상도 부모님, 수녀 같은 범생 언니들, 여중 졸업, 여고 졸업. 이런 나에게 교회는 설레는 별천지였다. 지적인 무테안경, 체크 난방과 스웨터, 이목구비만큼이나 행동거지도 반듯하고, 능숙한 기타 반주를 곁들여 가스송을 신승훈의 발라드처럼 부르, '마지막 승부' 장동건 못지않게 농구 잘하고,  영혼에 다정 관심 기울여 주는 오빠들을 만날 수 있는 곳.  합심 기도를 할 때는 은근슬쩍 손도 잡을 수 있었다. 오빠도 느꼈을까, 어색하게 맞잡은 손을 통해 짜릿한 전기가 내 온몸에 전해졌다. 방학 때마다 하던 중고등부 성경캠프 때는 경치 좋은 바닷가 마을에서 오빠들과 하루 종일 놀며 외박도 했다(물론, 잦은 예배와 성경공부, 교회 언니들, 전도사님도 있었다). 토요일 늘 성가대 연습이나 크리스마스 공연 준비 핑계로 오빠들을 만나 롯데리아 밥버거를 사 먹거나 영화 '쥐라기 공원' 보러 가기도 했다. 방학 때는 새벽 4시에 시작하는 새벽기도회에 가려고 자주 밤을 새웠다. 기도 시간이면 '그 오빠'가 왔나 부지런히 두리번거리며 았다.



 시절, 참 열심히도 신앙생활을 했다. 구원이나 천국은 안중에도 없고, 성경 말씀은 귓등으로 흘리면서, 그저 짝사랑하는 교회 오빠를 만나기 위해. 그러나 대학생이 되고, 맘대로 술을 마시고, 으스대며 니체의 책을 읽고, 무엇보다 박력 넘치는 마초 남친이 생기자 교회와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더욱 화려하고 자극적인 세상의 재미를 찾아 교회를 떠났다.


그리운 ○태, ○훈, ○식, ○섭 오빠들, 잘 살고 있을까. 지금쯤 존경받는 집사님이나 장로님이 되었겠지. 교회에서 제일 예쁘고 신앙심 깊은 자매님과 결혼해 온 가족이 서로 높임말 쓰는 평화로운 가정을 꾸렸겠지. 늘 궁금하던 차에 여기, 연길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교회 오빠'를 만다. 그것도 교무실 내 책상 바로 맞은편, 떡하니 마주 보고 앉은 직장동료로.


학기초, 학교 입학을 문의하는 민원전화가 왔다. 일부러 받지 않는 나와는 달리, P선생님은 재빨리 전화를 받아 복잡한 비자 문제와 입학서류를,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진심을 담아 친절하고 상세하 설명하고 있었다. 같은 돈 받고 일하는 처지에 어쩜 저럴 수 있지? 긴 통화를 끝내고 자리에 앉은 P선생님에게 내가 시니컬하게 물었다.

" P선생님, 기타 잘 치죠? "

"엉? 좀 치지."

"사모님, 교회 중고등부 때 만났지?"

"엉? 어떻게 알았어요?"

"앞에서 찬양 인도도 했겠어."

"어, 정말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 교회 다녔나? ○○중앙교회?"

"민원 전화 응대하는 거 보니까, 딱 교회 오빠 출신이네. 어찌나 다정한지 전화한 아줌마가 사랑에 빠지겠더."     


우리 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기럭지와 성시경 목소리를 가진 P선생님. 그의 반을 지날 때면 선생님의 기타 반주에 맞춰 아이들이 노래하는 소리, 때로는 선생님의 기타와 아이들의 우쿨렐레, 오카리나 합주 소리가 들린다. 우리 반에 우는 아이가 있다면, 나는 '여기 너네 집 아니다.' 딱 한마디 한다. P선생님은, '아이고, 누가 우리 ○○이 마음 아프게 했어? 일루 와. 선생님이 꼭 안아줄게.' 하신다.  


연길에 근무하던 첫 해, 주문한 교수학습 물품이 도착했으니 행정실에서 가져가라는 팝업 메시지를 받았다. 직접 가지러 가보니 여자 혼자 들만한 분량이 아니었다. 행정실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던 M주사님께 같이 옮겨주십사 정중 부탁했더니, "교무실에 남자 선생님 없어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남자 선생님들은 모두 수업 중이라, 결국은 나 혼자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며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도 가만히 앉아 게임이나 인터넷 쇼핑을 하고 있는 행정실 조선족 직원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좀 더 겪고 보니 그건, 우리 학교에서 가장 오랫동안 근무했음에도 가장 낮은 임금, 가장 낮은 처우, 학교 중요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해 온 오랜 소외감과 무력감의 표출이었다. 그런 분들을 우리는 '중국인이라서 딱 시킨 것만 한다.'며 오해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분들이 어찌 된 일인지, 한 학기가 지나자 눈에 띄게 달라졌다. 웃으며 학생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학생들의 텃밭 활동을 위해 모종을 사다 주기도 했다. 주말에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땐 만사 제치고 바로 달려와 요긴한 도움도 주셨다. 알고 보니 그 모든 변화의 배후에 P선생님이 있었다. 만능 스포츠맨, 선한 오지라퍼인 P선생님은 몇몇 친한 남자 선생님들만 배타적으로 참여해오던 교내 배드민턴 동아리에, P선생님 특유의 진솔한 친밀함으로 우리 학교 경비 요원, 행정실 주사님, 시간 강사들의 참여를 권하셨다. 퇴근 후, 같이 배드민턴을 치며 평소 어울릴 일 없던 연변 토박이 조선족 직원들과 한국인 파견 직원들 간의 교류의 장이 만들어졌고 자연스 서로 간의 이해와 존중, 친교로 이어졌다. '인간관계가 노동'이투덜이 줌마, 나도 어느  P선생님에게 매주 드민턴을 배운다. 물론 무료다. P선생님은 내가 자신이 배출해낸 ' 에이스'(여성 회원 총 3명 중에)라며 한껏 치켜세워주신다. M주사님과 한 팀이 되어 남녀 혼합복식 경기도 한다. 회식 자리에서는  P선생님과 내가 한 팀이 되어 노총각 M주사님을 '우리 학교 재간둥이'라며 마구 놀려먹는다. 그러면 M주사님은 '나, 가겠어요!'라며 화난 시늉을 하신다.  소박한 연변 유머웃음이 쏟아진다.



짝사랑하는 오빠를 보기 위해 야매로 교회를 다녔던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른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올바른 신앙으로 다져진 건강한 삶은 법이나, 성과급, 직원 평가, 학교교육, 경쟁과 시험 같은 것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낸다는 거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교회 오빠는 참 멋지다. 


종교는 평범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인 옷일 수 있습니다... 큰 성당이나 교회, 사찰을 비롯해 각자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경배드리는 성전을 찾아갑니다. 기도하거나, 성경이나 불경을 필사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 같은 모습 자체가 그를 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그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태도가 그 사람을 보여줍니다. 자기의 종교적 신념이나 가르침이 드러나는 어떤 행동은 우리 사회와 이웃에 그 종교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마태오12:7)"

 -한동일, 《믿는 인간에 대하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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