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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May 15. 2022

나의 수박 아저씨

중국인에 대한 편견에 대해

퇴근길에 늘 들리는 과일가게가 있다. 억품마트 맞은편, 인도에 벌여놓은 과일 노점상인데, 한 두 번 사다 보니 다른 곳 보다 과일이 신선하고 맛있어서 어느덧, 3년째 단골이 되었다. 어떤 날은 개구쟁이 우리 반 아이를 만나 아이가 좋아하는 거봉을 사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경찰이 노점상 단속을 하고 있어서 급박하게 노점을 정리하는 아저씨에게 염려 섞인 눈인사만 전하고 지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친한 동료와 매처럼 팔짱 끼고 서는 한 번도 안 먹어본  납작 복숭아나 엄지 손가락 같이 생긴 다래사 갈 때도 있었다. 어 여름날에는 아저씨 팔 전체에 어지럽게 난 흉터 자국들을 보고, "많이 아팠겠어요." 했더니 아저씨가 "그래서 다시는 싸움 안 해요."라고 덤덤하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서 1월과 2월에는 한라봉과 천혜향을 닮은 각종 달콤한 귤들을 사고, 3월에는 연길 근교, 용정이나 화룡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꼭지 파릇파릇한 딸기를 산다. 4월에는 작고 납작한 데다 꼭지 부분이 불그스름하게 물든 망고를 산다. 샛노란 과육이 어찌나 달고 맛있는지 나는 이 망고들을 사과처럼 덤벙덤벙 깎아 앉은자리에서 10개도 먹을 수 있다.


호박 고구마 아니고 깎아 놓은 망고들

5월에는 통조림이 아닌, 왕관 쓴 까칠한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서 있는 파인애플을 산다. 6월이 오면, 아, 6월이 오면, 드디어, 수박순이, 나만의 수박 대환장 파티가 열린다. 그때부터는 매일 밥 대신 수박을 먹는다. 반 통은 무릎 위에 얹어 숟가락으로 떠먹는 중이고 반 통은 냉장고들어 있고,  통은 부엌 바닥에서 냉장고에 들어갈 순서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수박 행렬이 6월부터 9월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렇게, 한 통에 2만 원이 훌쩍 넘는 한국에서는 꿈꿀 수도 없는 수박 호사맘껏 누린다. 그때마다  가게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붉고 가장 신선'파티용' 수박을 산다. 이제 아저씨는 '한국 수박녀'라고 쓰인 내 얼굴만 보고도 알아서 수박을 골라준다.


하루는 장만옥을 닮은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이 집 수박은 왜 이렇게 달고 맛있어요? 억품마트에서 파는 것과 완전 달라요."

"우리처럼 작은 가게들은 맛있는 걸 팔수밖에 없어요. 한 번이라도 맛없는 걸 팔면 다음부터 바로 손님이 끊기거든요."


오늘도 퇴근길에 이곳을 들렀다. 봄바람이 아직은 서늘한 요즘, 수박이 나오긴 했는데 1/4 덩이15위엔(3,000원), 아직 비싸다. 당장 한통을 사들고 아작아작 깨 먹고 싶지만,  왕수박 한 통에 20위엔(4,000원)이 될 때까지 좀 더 참기로 한다. 대신 무얼 살까 돌아보다가, 가장 덩치 큰 파인애플을 골랐다. 안 깎은 걸 사면 1근에 5위엔이고, 깎은 걸 사면 1근에 8위엔인데, 나는 단골이니 특별히, 은 걸 5위엔에 주겠다고 한다. 가판대 위에 이미 아놓은 파인애플이 6개나 있지만, 신선함을 위해 새로 아달라고 한다. "行!" 양조위를 닮은 아저씨가 흔쾌히 허락하고 계단에 앉아 능숙하게 파인애플을 기 시작한다. 기다리는 동안 또 무얼 살까 돌아보다가 사과를 고른다. 신선한 사과는 1근에 7위엔이고, 좀 시들시들한 사과는 1근에 5위엔다. 신선한 사과를 한참 살펴보다가, 결국 시들한 사과 2알을 골랐다.


아저씨가 매끈하게 깎은 파인애플과 사과의 무게를 달았다. 파인애플은 14위엔, 사과는 7위엔, 총 21위엔이다.  위젯 바코드를 스캔해서 과일값을 지불하고, 저울 옆에 잘라놓은 새빨간 수박을 살까, 말까 다시 고민한다. 문득, 확인차 "저기, 시들한 사과를  골랐는데..."라고 말했다.


과일 무게를 달아 파니 제일 큰 것을 고르지 않아도 속상하지 않다.

갑자기 아저씨가 당황해하며, 7위엔짜리 사과를 고른 줄 알았다며 사과 무게를 다시 재어준다. 내가 괜찮다고, 그냥 5위엔짜리 사과 하나를 더 가져가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다. 아저씨가 다시 한번 더 미안한 얼굴로, 정말로 7위엔짜리 사과를 고른 줄 알았다며 거듭 사과한다. 신선한 사과와 시든 사과 값의 차액 2위엔(400원). 길에 떨어져 있어도 굳이 허리 굽혀 줍지 않았을 적은 금액이다. 저울로 무게를 달아 파는 데다, 중국어도 잘 못 알아듣는 외국인이니 그냥 모른해도 몰랐을 텐데, 여러 번 사과하는 아저씨의 정직한 태도가 마음에 와닿았다.

 

중국에 살면서 바가지, 억울하고 황당한 일을 수도 없이 겪었다. 한 번은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에 안심하고 길을 건너다가 무리하게 코너를 돌던 승용차 측면에 부딪혔다. 차에서 내린 아저씨가 인상을 며 왜 자기 차에 뛰어들었냐고, 차에 스크래치가 났다며 성질을 냈다. 전에 살던 집주인은 오래돼서 저절로 늘어진 싸구려 블라인드를 내가 파손했다며 내 보증금에서 200위엔(40,000원)이나 깎았다. 똑같은 물건을 타오바오에서는 50위엔(10,000원)에 팔고 있었다.


횡단보도 초록불에서 나를 치어 놓고 자기 차에 뛰어들었다며 화내는 중국 아저씨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국 못지않게 상식적이고 친절한 대접을 받은 적이 더 많은 것 같다. 마트 체인 따룬파에서는 내가 주소를 잘못 적는 바람에 엉뚱한 곳으로 잘못 배송된 식료품을 벌금 없이 다음날 그대로  반품해주었다. 더운 여름날이라 주문한 돼지고기나 냉동식품들이 이미 상했을 텐데도 그렇게 해 주었다. 횡단보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땐 조선족 교통경찰이 사고처리를 도와주었고 다음날 찾아간 교통전담 경찰서에서는 CCTV 확인 후, 내가 일부러 자기 차로 뛰어들었다고 우기는 운전자를 단단히 혼내(?) 주시며 100% 운전자 과실 처리를 해주었다. 식당에서 먹다 남은 스파게티를 포장해달라는 나의 짧은 중국어를 잘못 알아들은 알바생이 남은 음식을 버렸는데, 지점장 선뜻 스파게티를 새로 요리하게 해 포장해주었다. 가게를 나가며 뒤돌아보니 내 음식을 버렸던 알바생이 자신의 실수이니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지점장에100위엔짜리 지폐를 내밀고 있었지점장 받지 않겠다며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알바생의 평균 시급은 10위엔, 스파게티 값은 그가 오늘 하루 종일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중국 관련 인터넷 기사에는 어김없이 '짱깨'니, '바퀴벌레'니 하는 악성 댓글들이 달린다. 나는 중국인이 중국인이라서 특별히 악랄하고 지저분하고 무례하고 속임수를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이든, 뉴욕이든, 중국 연길이든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단지 내가 한국이나, 유럽에서보다 중국에서 불쾌한 일들을 더 많이 겪는 건, 필립 짐바르도 '당신은 식초 통에 든 단 오이가 될 수 없다'는 말처럼 중국이라는 사회 체제의 전반적인 문제, 이를테면 폭발적인 자본주의의 발달과 격심한 빈부격차, 빈약한 복지제도와 사회 안전망, 낮은 인권의식, 엄격한 언론 통제, 당 독재정치 등 시스템의 문제이지 중국인 공통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 생각다. 내가 그런 시스템 속에 산다면 나 역시 아남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는 뻔뻔하고 구차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그 소속, 관습, 외모, 믿음에 따라 머릿속 구획들에 분류한다... 범주가 근사적 성질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마치 모든 남자, 여자, 아이에게 그 고정관념이 적용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범주를 도덕화(moralize)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집단을 본질화(essentialize)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 구성원들은 유사 생물학적인 본질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본질 때문에 집단이 균질하고, 불변하고, 예측 가능하며, 다른 집단과 구분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중


내가 동양인, 한국인, 중년 여성, 교사, 경상도 억양이라는 이유로 범주화, 본질화 되어 뭉뚱거려지고 멸시받기를 원 않는 것처럼 나의 친절한 수박 아저씨도 중국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그런 취급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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