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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Jun 05. 2022

만객륭 만세

중국 마트에서 물건을 세 번째 잃어버리면

어젯밤, 무선 이어폰을 사려 에어팟은 어떤지 물어보려고 대학생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거, 진작에 잃어버렸어." 

"뭔 소리야! 그게 얼마 짜린데 잃어버려?" 

"강의실 책상에 잠깐 뒀는데 다시 보니 없더라고. 2년이나 썼으니 잃어버릴 만도 하지."

이미 그런 일에 초연 듯 딸은 조금도 속상해하거나 후회하는 구석이 없다. 그 무심한 태도에 더 화가 난 나는 작년에 딸이 택시에 아이폰을 두고 내려 난리법석 떤 일까지 끄집어내 잔소리를 퍼부었다. 하지만 딸의 귓속으로 들어가기나 했을…….


그리고 오늘, 우리 동네 만객륭 마트에서 수박을 사들고 나오면서, 목이 휑하니, 마트에 들어갈 때 티셔츠 목에 선글라스가 없어졌다는 걸 달았다. 제주공항 면세점에서 큰맘 먹고 샀던 10만 원짜리 선글라스. 당황스러우면서도 픽, 웃음이 났다. 모전녀전. 이래서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하면 안 된다. 공부 못하는 것도 부모 닮아서고 게으른 것도 부모 닮아서고, 맹하고 엉성해서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것도 다 부모 닮아서 그런 건데, 저질 유전자를 타고나 안 그래도 고생하고 있 불쌍한 아이를 몰아세우 되겠는가.


당장 마트로 다시 달려가 선글라스를 찾고 싶지만 수박이 너무 무겁다. 마트에서 0.7위엔을 주고 산 얇은 비닐봉지는 수박을 온전히 버텨내지 못하므로 두 팔로 수박을 부둥켜안고 엉거주춤 걷고 있는 중이다. 원래 수박 살 계획이 아니었는데 '폭탄가! 1근에 1.68위엔!'이라는 팻말 눈이 획 돌았던 거였다.



방금 내가 산 반 통 수박은 15.9위엔, 한국돈 3천 원짜리고 방금 잃어버린 선글라스는 10만 원짜리다. 당장 수박을 길거리에 팽개치고 마트로 달려가 선글라스를 찾는 게 수지타산 맞는 행동이지만 다시 돌아가도 선글라스를 확실히 찾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수박은 지금 확실히 내 품에 안겨있다. 10만 원을 되찾기 위해 도박을 하느니 확실한 3천 원을 선택한다. 게다가 선글라스보다는 수박이 맛있다. 집으로 엉거주춤 걸어가는데 이제  온다. 분명, 오후 2시쯤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를 인했음에도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당장은 햇이 쨍쨍했고 우산을 들고 다니기 귀찮았다. 앞날을 미리 대비하지 않고 늘 눈앞 현실의 안일우선으로 선택하는 고질병도 딸에게 물려주었으리라. 그렇게 게으름과 어리석음, 탐욕까지 겹쳐 10만 원짜리 선글라스를 잃어버리고 고작 몇 백 원을 아끼겠다고 무거운 수박을 낑낑대며 들고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다. 그냥 집에서 낮잠이니 잘 것이지 왜 산책하겠다고 나왔을까, 산책할 거면 산책이나 하지 마트에는 왜 들어갔을까, 냉장고에 수박이 있는데 왜 또 수박을 샀을까, 집에 우산이  개나 있는데 왜 하나도 안 챙겼을까, 머리띠를 끼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쓴 것도 과한데 왜 이어폰까지 귀에 꽂았을까, 이어폰을 안 꼈다면 선글라스 떨어지는 소리를 분명 들었을 텐데. 선글라스를 잃어버리기 전까지, 내가 한 모든 행동과 결정들이 후회스러웠다. 늘 넘치는 호기심과 물욕, 변덕을 자제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마는 내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겨우 집에 도착해 돌덩이 같던 수박을 내려놓고 우산을 챙겨 재빨리 마트로 달려갔다. 


먼저, 마트 입구에서 코로나 바코드를 확인하고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선글라스 보셨어요? 조금 여기서 잃어버렸거든요. "

직원은,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데 머리칼과 옷이 흠뻑 젖은 채, 엉성한 중국어로 선글라스 찾는 여자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그걸 어떻게 기억요? 들어가려면 코로나 바코드나 보여주세요. "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입구로 들어가  먼저 고객 서비스 데스크로 달려간다.



"혹시 선글라스 없었어요? 방금 매장에서 잃어버렸거든요."

"없는데요."

아, 역시나... 린 마음으로 고객센터에서 돌아서찰나, 옆에 있던 한 젊은 아기 엄마가 말했다.

"아까, 야채 코너에서 누구 선글라스냐며 계속 외치던데요."

"정말요?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산대를 가로질러 황급히 야채 코너로 달려갔다.



사실, 단골인 만객륭 마트에서 물건을 잃어버린 게 이번이 처음 아니다. 첫 번째는 연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것저것 새 살림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잔뜩 샀는데, 계산을 마치고 장바구니에 담다가 운동화 솔 하나를 빠뜨렸다. 집에 가서야 운동화 솔이 빠진 걸 알고 다시 와 고객센터에 물었더니, 뜻밖에도 계산대에 놓고 간 운동화 솔이 거기에  있었다.



두 번째는 작년 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용유, 우유 등 이것저것 식료품을 두서없이 사고 계산하려다, 딸기를 안 샀다는 게 떠올랐다. 일단, 계산 대기줄이 길었으므로 먼저 고른 상품들을 계산하고 꾸러미 채 계산대에 잠시 맡긴 다음, 매장으로 다시 들어가 딸기 한 팩을 골라 따로 계산했다. 이때, 무슨 일로 정신이 나갔던지 딸기 산 영수증만 야무지게 챙긴 채, 먼저 샀던 꾸러미만 달랑 들고 집으로 갔다. 이번에도 다시 와 고객센터에 영수증을 보여주며 딸기를 찾았더니, " 딸기 하나만 샀는데 그 하나를 놓고 갔네요." 직원이 깔깔 웃으며 보관하고 있던 딸기를 내주었다. 그 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다른 중국 직원들도, 계산대 출구를 지키고 있던 보안 요원도 덩달아 웃고 나도 깔깔깔 같이 웃었다. 내 엉성한 행동 덕분에, 오랜 역사적 갈등을 딛고 한중 아줌마, 아저씨들이 웃음으로 하나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수박 폭탄가에 눈이 멀어 잃어버렸던 내 선글라스도 무사히 찾았다. 야채 매대 어딘가에 떨어져 있던 내 선글라스를 야채 코너 직원이 주워 저울 옆에 얌전히 모셔놓고 있었다. 아, 정말, 삼세번 모두 합격, 만객륭 만세다. 


그리고 딸이 그릇을 자주 깨 먹는다고, 음료 잘 쏟는다고, 음식을 쩝쩝 소리 내며 먹는다고, 용돈을 계획 없이 많이 쓴다고, 먹는 것 노는 것만 너무 좋아한다고, 좀 못생겨도 똑똑하고 지혜로운 남자는 알아볼 줄 모르고 무조건  생긴 남자만 좋아한다고 너무 나무라지 말아야지. 대체 누 닮아서 그렇겠냐고!


'문명한 연길 사람이 됩시다' 시내 곳곳에 붙은 연길시 표어, 잃어버린 물건도 이렇게 잘 찾아주는 걸 보니 이미 문명한 연길 사람들이 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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