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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Sep 28. 2022

구월의 이틀

내 생애 가장 빛나는 날

월요일 출근길, 가을이 오기도 전에 벌써 겨울이 다가온 듯, 으스스하고 흐린 날씨. 점퍼 속에 반팔 셔츠 하나만 입고 나선 것을 후회하며 학교에 도착했다.


1학년 교실문을 열었더니 페인트 냄새가 진동한다. 교실 창문 하나도 휑하니 열려있다. 무슨 일인가 다가갔더니, 열린 창문으로 연결된 현관 옥상에서 왠 멀쑥한 청년 하나가 페인트 칠을 하고 있다. 4층 옥상 공사를 하는 김에 학교 건물 페인트 칠도 다시 하는 모양이었다. 짧은 중국어로 몇 마디 물어보니, 수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아침 6시부터 페인트칠을 시작했고 곧 작업이 끝날 거라고 다.


친구들보다 30분 먼저 등교해 한글보충공부를 하는 이가 가장 먼저 교실 들어왔다. 오늘은 큼직한 미키마우스 머리띠에 '엉덩이 탐정'이 입었을 법한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었는데 옷깃세우고 허리끈까지 질근 묶은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난다. 연길에서 작은 업체를 운영하시는 멋쟁이 엄마가 주말, 백리성 백화점에서 골라준 옷이리라. 이는 연길에서 태어나 자랐고 집에서도 조선족 어머니와 중국어로 의사소통한다. 그래서 한국어나 한글이 많이 서툴다. 마음이 여려 잘 울지만 누구보다 맑고 선량한 그 아이의 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입고 온 새 코트를 벗어 의젓하게 옷걸이에 걸어놓더니  이내 창문으로 향한다.


곧이어 이도 도착했다. 이의 아버지는 북경에서 헤어디자이너 일을 하시고 이는 연길에서 엄마, 오빠와 함께 산다. 북경의 비싼 집값이며 생활비를 감당하기보다는 어린 자녀들이 아버지와 떨어져 연길에서 안정되고 풍족하게 사는 것을 선택한 듯했다. 일 년에 고작해야 서 너번 만나는 아버지지만, 이는 미용업에 종사하는 아버지의 딸답게 헤어스타일부터 양말까지 언제나 완벽한 옷차림글씨도 반듯하고 그림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그리는 똑똑하고 야무진 아가씨다. 경쾌한 치어걸 주름치마를 입고 온 아가씨도 책가방을   창문으로 직행.


곧이어 이와 이가 같이 들어온다. 이의 아버지는 연길에 있는 정관장 공장 주재원이시다. 이는 친구들에게 양보를 잘하고, 눈알까지 굴려가며 좀비와 고릴라 흉내를 실감나게  , 너그럽고 재미있는 남학생이다. 그래서인지 2학년, 3학년 형아 누나들에게까지 두루 인기가 많다.


이는 이번 2학기, 한국에서 전학 온 여학생이다. 조선족 어머니가 재혼하시면서 한국에서의 일을 접고 이를 데리고 연길로 돌아오셨다. 외가는 러시아 국경 근처 훈춘에 있다고 들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여태 한국에서 살아온 이는 아직 연길도, 중국어도, 한 반에  다섯 명뿐인 우리 반도 낯설다.


마지막으로 교문에서부터 줄곧 달려와 거친 숨소리를 내, 호기심 대왕 이가 도착했다. 유치원 동생이 있는데다 부루하통하 강 건너, 학교에서 가장 멀리 사는 이는 늦을 때가 많다. 부모님 다 한국분이시고 아버지는 연길에서 꽤 유명한 안경점을 운영하신다.


태어난 곳도, 생김새도, 성격도, 부모님 국적도, 연길에 사는 사연도 제각각인 초등 1학년, 5명 아이들이 쪼롬히 창문에 붙어있다. 그 중 세 아이는 아직 책가방을 벗지도 않았다. 이제 그만 자리로 돌아와 아침 독서를 하자해도 꿈쩍도 않는다.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아저씨 엉덩이 보여요." 한다. 청바지를 입은 채 쭈그리고 앉아 페인트 칠하는 청년의 허리춤으로 속옷이 삐져나와있고 엉덩이 골도 살짝 보인다.

"열심히 페인트 칠 하시다 보니 바지가 살짝 내려갔나 봐. 놀리면 안 돼요."

"아저씨 힘든가 봐."

"옷에 페인트도 다 묻었어."

"바지, 다 내려가면 어떡해요?"

"그럼, 고추 보여요?"

"으!"

"우리가 가서 도와줄래요!"

"나도 도와줄래요!"

"저도요!"

행동파 이를 시작으로 다들 창문을 넘어가겠다고 난리다. 얼른 달려가 아이들을 말리며 창 밖, 페인트 칠 청년에게 능청맞 도움을 청한다.

"저기요, 아저씨! 이 아이들이 도와드리겠다는데 혹시 도움 필요하신 가요?"

아이들의 개구진 본심을 이내 눈치챈 청년이 싱긋 웃으며,

"얘들아, 여기는 너무 위험하니까 넘어오지 마. 페인트라도 묻으면 안 지워지는데 어떻게 하겠니?"

"그럼, 아저씨 옷에 묻은 건 어떡해요?"

"아저씨는 일할 때만 입고 버리는 옷이라 묻어도 상관없어."

"페인트 칠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도 해볼래요."

"저도요, 저도요!"

"이 일은 아주 힘들고 위험한 일이야.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 도와주지 않아도 돼. 너희들은 공부나 열심히 하렴."


그래도 아이들은 창문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위아래, 가로 세로로 촘촘하게 롤러를 굴리는 청년의 뒷모습을 홀린 듯 계속 쳐다보고 있다.


얼른 서랍장을 뒤져, 클레이를 만들 때 쓰는 미니 롤러를 꺼내 아이들에게 보여준다.

"여기, 어린이용 롤러 딱 5개 있는데, 이걸로 물감 칠해볼 사람! "

그제야 겨우,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1교시, 롤러로 가을 들판 칠하기 즉석 즐생 수업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담임 선생님 먹으라고 쉬는 시간 만들어준, 고르곤졸라 떡볶이, 딸기치즈케이크, 스테이크, 망고스무디, 딸기스무디, 호떡...이래서 살이 안 빠진다.


《구월의 이틀》, 문득 대학시절 읽었던 장정일의 소설 제목이 생각다.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달, 9월. 그 9월 중에서도 비 오는 날, 흐린 날, 덥고 추운 날들을 뺀, 가장 맑고 가장 푸른 날, 딱 이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아름다운 날, 9월의 이틀. 내 인생의 '9월의 이틀'이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아닐까. 내 몸과 마음이 함께 이 순간에 머문 날. 내 마음가짐만 바꾼다면 일년 중 어느 때라도 머물 수 있는, 9월의 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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