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문정 Oct 25. 2022

부활의 땅

정원에 날아다니는 애들 중에 너무 작고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검정 점들이 있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시는지? 그중에 몇몇은 작은뿌리파리였을 수도 있다. 실내에서 화초를 키운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악명 높은 그 분 맞다.


작은뿌리파리는 초파리보다도 더 작다. 그런데도 식물 집사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은 이유는 유충이 뿌리를 갉아 먹어서 애지중지하는 식물을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 작은 몸집은 오히려 이 악명에 보탬이 됐다. 얘는 워낙 작은 탓에 방충망이 있어도 틈으로 들어와 촉촉한 흙에 알을 까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자라기는 또 얼마나 빠르게 자라는지 알에서 성충이 되는 데 이십 며칠밖에 안 걸린다.


다행히 옥상 정원에서 이들이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은 없다. 아마도 옥상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통풍이 잘되는 걸 넘어 통풍 그 자체인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 흙의 표면은 뿌리파리를 유혹하기에는 너무 퍼석했다. 설령 몇 마리 나온다고 해도 끈끈이 트랩을 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설치한 적은 없지만 옥상 VIP 거미들이 여기저기 정교하게 설치해뒀다!


문제는 집 안에 있던 화분이었다. 가지치기해서 나온 뱅갈고무나무 가지를 삽목한 새로운 화분 몇몇에서 뿌리파리로 의심되는 작은 날벌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과산화수소수를 희석해서 뿌려보고, 통풍 잘 되는 옥상으로 자리도 옮겨줘 봤다. 그리고는 매일 같이 들여다보며 뿌리파리가 있는지 확인했다. 수가 늘어나지는 않지만 몇 마리씩 계속 출몰하며 긴장감을 조성했다.


다른 화분에 옮을 위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뿌리파리가 나온 화분은 전부 분갈이를 해주기로 했다. 분갈이하고 나서 뿌리파리가 나온 흙은 죽은 흙들이 가는 땅으로 보냈다. 그러자마자 귀신같이 뿌리파리 문제에서 벗어났고, 나는 저승으로 간 이 흙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몇 달 뒤, 죽은 흙들이 가는 땅이 다시 소환됐다. 죽은 흙들이 가는 땅은 옥상에 방치된 네모난 통이다. 원래는 화분이 아니라 이중으로 포개진 다용도 상자인데, 상추밭이었던 텃밭 상자를 야생초들이 가져간 뒤에 잠시 대리 상추밭으로 활동했었다. 하지만 흙 수명이 다해가는지 상추들은 잘 자라지 않았고, 흙도 딱딱해져 갔다. 다용도 상자는 그렇게 지력이 다한 흙들을 모아두는 곳으로 전락했다.


뿌리파리가 생겼던 흙이 간 저승이 바로 그 상자다. 아무리 버리는 흙이라며 휙 던져버렸어도 혹시나 뿌리파리가 늘어나면 정원의 다른 화분으로 옮겨갈까 봐 방제작업은 확실히 했다. 희석한 과산화수소수를 콸콸 들이부어 소독하고, 속까지 잘 뒤집어가며 햇빛에 말렸다.


너무 바삭하게 말라보였는지 가끔 지나가던 엄마가 흙에 비를 맞힌다며 빗물 많이 떨어지는 데다가 내놓기도 했다. 그러면 또 지나가던 내가 “아니, 이거 배수 구멍도 없는 통인데 물이 출렁일 때까지 방치하면 어떡해!” 하고 기울여서 물을 따라버리고 며칠 동안 뒤집어 가며 흙을 바싹 말렸다. 그러면 다시 지나가던 엄마가 “아니, 아무리 식물을 안 키우는 땅이어도 그렇지 왜 이렇게 바싹 말렸어?” 하고 비를 맞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분갈이할 흙이 모자라니 그 흙이라도 조금 가져다 써야하나 하고 옥상에 올라간 엄마는 만족하며 돌아왔다. “흙 멀쩡하더구만!” 엄마는 그 저승에서 흙을 푸다 지렁이도 다섯 마리쯤 발견했다고 했다.


지렁이가 나왔다면 이제 그 땅은 이미 좋은 땅이거나 앞으로 좋은 땅이 될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흙들의 유배지 같은 곳이었는데 말이다. 얼마나 버려진 땅 취급했으면 가끔 땅에 떨어져 썩고 있던 사과를 발견하면 주워서 거기 버릴 정도였다.


뼈 빠지게 식물만 키우다가 쉬고, 과산화수소수로 소독하면서 산소 공급도 받고, 햇빛에 바싹 말라 뿌리파리는 죽고, 비를 잔뜩 맞아 식물에 영양분이 될 질소 성분은 얻고…흙에게는 회복 휴가 같은 거였나?


흙은 그렇다 치자. 지렁이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흙에 지렁이알이 어떻게 휩쓸려 들어가 있다가 조건이 맞아서 부화했으리라는 게 가장 타당한 가설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흙이 자아를 갖고 지렁이가 된 것처럼 보였다.


등장 경로야 미스터리하더라도 일단 지렁이가 살면 생기 잃은 흙을 건강한 지렁이 분변토로 바꿔줄 테니 좋은 일이다. 죽음의 땅을 부활의 땅으로 바꾸는 지렁이야말로 VIP 초청감이지. 만나서 반갑지만, 옥상 정원의 식구가 되겠다면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 안에 지렁이가 먹을 게 뭐가 있지?” 똑같이 VIP여도 무당벌레나 거미는 걱정 없었다. 알아서 먹이가 있는 곳에 자리 잡고 끼니를 해결했으니까. 그런데 그 상자에는 정말 흙밖에 없는데?


흙이 지렁이가 된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건 등장이 신화적으로 보일 만큼 신기했다는 소리다. 지렁이가 흙을 먹고 산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러다 생각이 났다. 내가 거기 떨어지고 썩은 미니사과들을 버린다고 파묻었다는 게.


‘지렁이 키우기’, ‘지렁이 밥 주기’를 검색했다. 지렁이는 과일과 채소류를 좋아한다고 한다. 이가 없어서 약간 부숙되어 물컹해지면 먹기 시작한다고? 아하, 그러니까 파묻은 사과가 물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으면서 살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포도 껍질과 수박 껍질 귀신이라는 경험담도 많이 나왔다. 특히 수박 껍질은 지렁이 사육인들이 지렁이에게 주기 좋아하는 먹이인 것 같았다. 부피 큰 음식물 쓰레기는 처치 곤란인데 잘 됐다면서.


지렁이 사육인이라니. 신기했다. 우리 집에는 우연히 들어온 객식구인데, 일부러 수십 마리를 사다가 키우기도 하는구나. 일부러 키우는 사람들은 지렁이가 음식물 쓰레기를 일정부분 처리해줘서 쓰레기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고 호평했다. 만약 음식물 쓰레기 처리 목적으로 지렁이를 키우는 거라면 몇 가지는 주의하랬다. 첫째, 고기와 생선류는 지렁이들이 잘 먹지 않고 부패할 때 가스도 많이 나오므로 지양할 것. 둘째, 지렁이가 밥·국수·잔반류를 먹을 수 있긴 하지만 소금기는 제거해서 줄 것.


수챗구멍에 걸린 음식물까지 긁어서 먹일 만큼 지렁이들이 많이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있는 지렁이들의 과일 배식 담당이나 하기로 했다. 이러면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한다기보다는 지렁이를 모시는 것에 가까워지겠지만, 얘들이 이미 옥상에 자리를 잡아버렸는데 어쩌겠나.


마침 시골에서 할머니가 농사지은 멜론을 보내주셨다. 부엌에서 멜론을 자르는 엄마에게 “지렁이 갖다주게 껍데기 버리지 말고 나 줘.” 했다. 엄마는 가장 딱딱한 바깥 껍데기를 살짝 깎고 거기 붙어 있던 흰 속을 줬다. 나는 그걸 받아서 먹기 좋게 엄지손톱 크기로 잘랐다. 지렁이는 입이 쪼끄마할 테니.


멜론을 흙 여기저기에 묻고 흙으로 잘 덮었다. 흙 위에 대충 올려뒀다간 과일 냄새를 맡고 초파리까지 꼬일까 봐. 사방에 흩뿌려 놓은 건 눈도 코도 없는 지렁이가 먹이가 어디 있는지 못 찾을 것 같아서였다. ‘기어가다 우연히 멜론을 주우면 땡잡은 것처럼 기분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잘못 준 것이더라. 먹이는 한쪽에 몰아서 주는 게 맞는 방식이었다. 지렁이는 식당과 휴게공간을 분리하기 때문에 한 귀퉁이로 몰아야 한단다. 지렁이들이 물컹해진 음식을 먹으니까, 부숙될 때 가스가 나와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식물 기를 때, 나뭇잎도 비료가 되지만 완전히 다 썩은 뒤에나 식물에게 줘야지, 안 그러면 썩으면서 나오는 가스 때문에 식물에게 안 좋다고 하지 않나.


지렁이에게 먹이를 주는 방법


한 번 실수한 뒤에는 정신 차리고 한쪽으로 몰아줬다. 주는 과일은 매번 조금씩 달라졌다. 잘 먹고 있나 궁금해서 흙을 살짝 파봤다. 지렁이가 제일 잘 먹는 건 멜론과 참외였다. 둘 다 껍질을 준 건 아니고 껍질 안쪽으로 같이 깎여나온 과육만 따로 떼어 줬다. 포도 껍질도 잘 먹기는 했지만, 멜론이나 참외보다는 없어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껍질이 좀 질긴가. 미니사과 먹고 나서 남은 심도 죄다 여기다 파묻었는데, 물컹해지는 중인 심이 몇 개 나왔다.


자연 상태가 아니라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어서 너무 그대로 두면 밑바닥과 테두리 흙이 딱딱해진다. 그러면 지렁이들이 이동하기 불편할까 봐 가끔 흙을 뒤섞고 교체도 해준다. 대청소 날이면 빈 화분 받침에 포도 껍질이든 파먹힌 사과심이든 음식물을 다 꺼내고, 흙 속에 숨은 지렁이들도 쏙쏙 뽑아 그 위에 올려둔다. 그럴 때 수를 세보면 지렁이가 꼭 몇 마리씩은 늘어나 있다.


흙을 촉촉하게 적시고, 일부는 힘 빠진 다른 흙과 교환했다. 지렁이에게 과일을 주고 분변토를 얻었다! 모종삽으로 신나게 흙을 뒤섞고 있자니 아이스크림 가게 알바를 하다가 팔 근육이 붙었다는 친구가 생각났다.


흙 한 귀퉁이를 파 약간 남은 음식과 새로 가져온 멜론, 그리고 지렁이들을 넣고 흙을 잘 덮었다. 부활의 땅 상자는 그늘진 선반 아래다 두었다. 뚜껑은 따로 없었다. 지렁이 키우는 사람들이 쓴 글을 보니 뚜껑이 없으면 그냥 탈출해버리기도 한다고 해서 조금 불안했다. “여기가 싫어서 나가는 건 괜찮은데, 이 밖으로 나가면 흙바닥이 아니라 초록색 방수페인트 바닥이라고. 그리고 여기 새 많아서 잡아 먹힐지도 몰라.” 하고 알려줬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을 게 뻔한데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람. 이럴 때면 동물-사람 공용어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건너건너 지인이 강아지를 입양하지 않겠냐고 권했을 때, 내가 뭘 제대로 키울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지 않아서 긴 고심 끝에 못 키우겠다고 했다. 그런데 강아지도 아니고 지렁이를 키우고 있다니. 이 정원에서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써도 계속 뭔가에 휩쓸리게 된다. 강아지랑 뛰어노는 상상을 하다가 나랑 대면을 거부하고 순식간에 흙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지렁이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뭐, 그래도 네가 잘살고 있으면 됐다!” 이걸 지렁이 말로 뭐라고 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