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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크코뿔소 Aug 30. 2023

아빠의 세면대

            - 내가 가부장제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집 근처에 용서점이라는 빈티지하고 힙한 동네서점이 있다. 서점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마는 서점 주인이 그런 사람이었다. 여기에 '써용'이라는 글쓰기 모임이 있어서 한달에 만원이라길래 즉석에서 가입했다가 수개월을 머물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만나 일상사를 글로 공유하며 친해진 언니들은 이제 베프가 되어 버렸다. 



                                                                  ************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로 시작하는 노래처럼 장판에 발바닥이 쩍하고 붙었다 떨어진다. 아빠 방이다. 아빠 방에 들어설때는 항상 신경이 곤두선다 생각할 때쯤 발바닥에 뭔가가 느껴졌다. 발바닥을 뒤집어보니 강냉이 부스러기, 땅콩 껍질 조각, 심지어 큰 고춧가루 한 알이 붙어있다. 여기서 밥을 먹었을 리는 없고 이 사이에 낀 게 퉁겨 나온 건가 싶으니 속이 울렁거렸다. 이래서 아빠 방에는 거의 안들어 오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어제 친구가 왔다가 내가 거실 화장실을 쓰는 동안 급한 김에 아빠 방의 화장실을 찾아내어 쓰고 나오면서 한 말 때문이다.

             "저 화장실은 아예 안 쓰는 거야?"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화장실이 아니고서야 이럴수가 있냐는 뉘앙스가 느껴져 제 발 저리듯 불안함이 등줄기를 스쳤다. 아빠가 여행간 사이 불러들인 친구가 제발 그 방만은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급하니 어쩔 수 없었다며 금지한 방문을 기어코 연 것이다. 아빠 방에 딸려있는 화장실은 욕조가 없고 크기도 작다. 그 답답함이 싫어 문을 열고 용변을 보는 건지 아빠가 화장실에서 언제 나왔나 싶게 여닫는 문소리가 들리지 않은 적이 많다. 그래서 더 그 근처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얼굴만한 바가지가 세면대 위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다. 거뭇거뭇 때가 끼고, 하도 써서 주름이 닳아 맨들해진 그 바가지는 세 번의 이사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샤워기가 있는데, 굳이 그 바가지에 물을 받아 세수하고, 그 물을 몸에 끼얹는 그 방식을 난 물 절약이며 환경 사랑이라 칭할 수 없다. 그 바람에 여기저기 물이 튀어 화장실 문짝 나무가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면대는 바가지를 담아두는 대야의 역할을 하느라 물이 늘 받아져 있어 오렌지빛 물때가 미끈미끈했다. 세면대 아래에는 벽돌만한 크기의 누런 빨래 비누가 네 모서리를 상실한 채 하수구 구멍 옆에 아슬아슬하게 컬~링을 마친 상태로 멈춰있었다.

   망연자실했다. 이사온 지 육개월 정도된 이 아파트는 왠만한 잡동사니를 많이 정리하고 오래된 방석이나 커튼들도 다 이케아에서 내가 골라 심플한 것들로 갈아둬서 미니멀하우스를 표방하고자 했다. 내가 쓰는 화장실에는 디퓨저 뿐만 아니라 브랜드 욕실 제품을 한 두 개씩 전시해 두어서 아빠방을 열기 전까지는 이제 내 취향으로 가득한 그런 집이 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아빠는 깨끗하게 정돈된 게 그냥 싫은 걸까? 아니면 그 노력이 칠십의 나이에 버거운 걸까? 간단히 내가 정리해버려야겠다고 결정하고 그 못난 바가지부터 갖다 버리려 집어드는데...

   바가지를 집으려다 한 발짝 물러서 다시 바라본 모습은 어딘가 익숙했다. 빨간 고무 다라이에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가 동실동실 떠있고, 빨래 방망이와 누런 빨래 비누가 그 옆을 지키던 할머니집 청량리 앞마당 개수대의 정경을 떠올리게 했다. 아빠는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이 작은 화장실에서라도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아빠가 어떤 사람이던가. 자신의 표정하나로 집안 공기를 얼리기도 하고 풀기도 하던, 남은 가족들끼리 둘째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거리며 알아서 눈치보게 만들던 무서운 호랑이 아니였나. 초등학생이던 내가 미용실도 아닌 집에서 머리를 짧게 잘리기 싫어서 입을 삐죽이면 아빠는 인상을 쓰며 꿀밤을 쥐어박곤 했다. 엄마가 그런 나를 편들면 엄마한테도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집에서 아빠에게 보던 눈치는 밖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 그리고 대부분 남성인 상사들에게 고개를 빳빳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뼈에 좋다는 거 또 샀어?"

   몸에 좋다는 것들이 부엌 여기저기에 쌓일 때면 이제 나는 아빠에게 따져 묻고, 아빠는 변명하기 바쁘다. 아빠가 무섭다는 생각에 가려져 제대로 보지 못했던 아빠의 미성숙한 모습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자신의 의견과 다르면 화부터 내고, 상대방의 기분보다는 이기고 지는 지에만 집중하고, 정리 정돈 같은 것에는 무관심한... 아빠의 방은 청량리 할머니댁을 그리워하는 14살 그때의 미성숙한 아빠의 내면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방을 모른척 해온 것은 아빠의 마음을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텅 빈 냉장고를 모른채 하고, 아빠의 얼룩 뭍은 셔츠와 밑단을 줄이지 않아 너덜너덜해진 바지를 모른척하고...이제 마흔이 넘어서야 어린 시절부터 나를 항상 주눅들고 쫄아있게 만든 아빠에게 나도 모르게 소심한 복수를 하고 있는가 보다. 아빠는 돌아가신 엄마 없이 하루하루 씻고 주변 정리하는 것도 이제는 버거울텐데 말이다.

   상황은 달라졌다. 늙은 아빠가 아직도 미성숙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내가 두려워했던 과거 아빠의 모습들이 사실은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해서였다는 걸 짐작해볼 수 있게 됐다. 아빠는 나에게 사회였다. 이런 아버지에게 연민은 느끼되, 아버지에서 시작해서 남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끈덕지게 영향받았던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이제 세상에 대해 느끼던 두려움을 떨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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