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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난한 Feb 19. 2023

요란 속 핑크(1)_기울어진 남산 타워 위의 그 기계

요란 속 핑크


* 본 소설은 실제 지명 혹은 단체와 관계없으며 모두 픽션입니다.


<요란 속 핑크>

세계 4차 대전 뒤 기울어진 남산 타워 위의 작은 소동. 이수의 이야기.

tilekid - you not the same

01. 기울어진 남산 타워 위의 그 기계

 

 날카로운 경보음이 이수를 깨웠다. 이수는 손을 뻗어 침대의 머리맡에 성의 없이 걸린 방독면을 낚아챘다. 불행에 형체와 무게가 없지만 종류는 다양했다. 그중, 멸망은 이수에게 성가신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본래 노란색이었을 고무가 바래 갈색빛을 내는 방독면을 뒤집어쓰기까지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방독면 곳곳에 붙은 토끼 모양 반짝이 스티커가 떨어질 듯 모서리 끝이 들렸다.


 이수는 개의치 않고 정화통을 툭 쳤다. 며칠 전, 목적도 없이 정화통의 필터를 갈았던 변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어둠을 헤쳐 장화 속에 발을 욱여넣고 여우 털 누빔이 있는 점퍼를 뒤집어썼다. 가까운 곳에 스위치가 있지만 이수는 두꺼운 철문의 문고리부터 잡았다. 전기가 끊겼으니 불은 켜지지 않는다. 이수는 누군가의 관을 여는 기분으로 문을 당겼다.


 이번에는 무엇이 재앙의 원인일까? 새의 시체? 곰팡이? 찌그러진 캔? 이수는 그동안 서울을 위협했던 다양한 사례들을 떠올렸다.


 작고 흔한 것들이 재앙의 시초가 된다. 이수는 제 생의 반절 정도를 그 사실을 증명하는 데 할애했다. 열없이 지루한, 섬뜩한 나날이었다.


 문을 열자 어김없이 사다리가 등장했다. 사다리는 위와 아래, 지하와 지상으로 나눠 어둠 속으로 뻗고 있었다. 이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지상으로 향하는 사다리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사다리의 디딤대는 쇳녹이 들어 피비린내가 났다. 굳은살이 박인 이수의 손바닥은 거침없이 다음 디딤대를 붙잡았다.


 터널 안은 불빛 하나 없어 위로 고개를 뻗어도 어둠뿐이다. 태초에 빛이 없었다면, 신화 속 어느 아버지는 아들을 잃지 않았을 테고, 인간은 지금과 같은 현실에 치닫지 않고, 이수의 언니는……. 이수는 마저 다리와 손을 놀렸다. 불규칙한 숨소리와 쇠기둥 위로 발을 딛는 소리가 일정하게 터널의 벽을 때렸다.


 숨이 가빠질 때쯤 이수는 오르는 일을 멈추고 손을 뻗었다. 이수의 어림짐작이 다른 날과 같이 맞아떨어진다. 차가운 벽이 이수의 머리맡을 가로 막고 서있다. 손끝에 만져지는 이음새를 따라 벽을 훑으니 손잡이가 아귀에 들어왔다. 이수는 손잡이를 밀어 올려 새끼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벙커를 빠져나왔다.


 이수는 내리쬐는 빛에 얼굴을 찡그리며 스틸 판 위에 섰다. 바람이 이수의 점퍼 속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스틸 판은 좁았다. 성인 남자 둘이 겨우 설 수 있을 법한 너비였다. 이수는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발아래로 모든 것이 점처럼 작았다.


 이대로 남산 아래로 떨어지면 이수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고 서울은 남루한 생을 비로소 끝마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니가 원치 않는 일이다. 겨울의 찬 공기에 바짝 조여든 철탑의 철근들이 비릿한 쇳소리를 내며 몸을 비척거렸다. 이수의 눈에 그제야 그것이 들어온다.


"언니, 나 어떡해."


  꽃비가 이수 위로 쏟아진다. 그것들은 바람에 따라 방향을 바꾸며 떠오른다. 꽃잎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먼지다. 핑크빛의, 스노우볼 안의 반짝이처럼 흩날리는 그것. 지금껏 가꿔온 문명을 간단히 부수어낸, 작고 고운 재앙. 이수의 복면 안으로 습기가 차오른다.     




 이수는 이렇게 많은 먼지는 처음 보았다. 이수가 먼지를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는 가벼운 가랑눈처럼 그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버섯 전쟁 이후로, 세상에는 어떤 식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현상과 사건들이 종종 벌어져서 이수는 그, 독을 품은 먼지 또한 그중 하나라고 짐작했다.


 버섯 전쟁 이후로 세계는 좀처럼 틀을 잡지 못하고 물렁물렁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전쟁을 피해 땅속으로 숨었던 사람들뿐이었다.


 다시 땅 위로 올라왔을 땐, 잠깐 인간이 부재했던 세계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폭된 대륙의 나무, 땅, 동물은 알던 것들과 다른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세계에 떨어진 듯 어리둥절했던 사람들은 이내 흩어졌다.

 

 단절과 인내 그리고 이기심. 땅속으로 몸을 숨겼던 사람들은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들은 답습하고 필요하지 않는 것들은 단호히 버렸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국경, 사회, 공동체, 계급이 사라진 세계는 굳히지 못한 젤리처럼 유연하게 자주 모습을 바꾸며 사람들을 휩쓸었다. 이수가 느끼기에 그랬다. 속절없이 휘말리게 되는 제멋대로인 세계라고.


 수백 개의 핑크빛 먼지가 바람을 따라 하늘 위를 천연덕스럽게 유영했다. 지구는 빠르게 독이 오르고 있다. 이수는 시선을 머리 위로 올렸다. 먼지들 사이로 거대한 건축물이 보였다. 기계. 기계가 고장이 난 것이다.


이때껏 기계가 완전히 멈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수는 어느새 방독면의 안면렌즈에 다닥다닥 붙은 핑크색의 그것들을 손등으로 쓸어 닦았다. 가끔 이물질 때문에 속도가 더뎠던 일은 있었지만 엔진이 꺼지진 않았다. 톱니에 낀 쓰레기 따위를 치워서 해결될 간단한 일이 아니라면 큰일이었다.


눈이 앉은 남산 위에 타워가 기울어진 채 있다. 그 풍차와 같은 생김새의 기계는 기울어진 타워 위에 꼿꼿하게 서 있다. 기울어진 것 위에 무언가를 짓고 올릴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 비웃음 받던 때가 있었다.


 보기에 엉망이지만 분명한 축이 있다고. 무게중심과 축이 이상할 정도로 아귀가 맞아 단단하다고. 온종일 사람들을 설득하고서 돌아온 이수의 언니가 지친 얼굴로 언젠가 날숨처럼 혼잣말을 내뱉었다.


 망가져서야 단단해지는 면은 건물에, 기계에, 사람에게도 있는 법인데 하나 다른 점은 사람들에겐 겁도 있다는 거야.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때의 이수도 언니가 말하는 ‘사람들’과 같아서 못 들은 척 언니의 혼잣말을 흘렸다. 그 기계로 향하는 사다리에 오르며 이수는 속삭였다. 난 지금도 무서워,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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