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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난한 Jun 10. 2023

요란 속 핑크(2)_결국 핑크빛 세계

* 본 소설은 실제 지명 혹은 단체와 관계없으며 모두 픽션입니다.


<요란 속 핑크>

세계 4차 대전 뒤 기울어진 남산 타워 위의 작은 소동. 이수의 이야기.

daniel.mp3 - green to blue (slowed + reverbed)


02. 결국 핑크빛 세계


기계에게도 이름이 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수는 그 이름을 잊은 척 지냈다. 이름 같은, 다른 것들과 뜻도 음도 분명히 구별할 수 있는 것으로 불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수가 그 기계가 세워진, 기울어진 타워에 계속 머무는 이유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이다. 


독을 품은 핑크빛 먼지가 서울을 오염시키는 모습은 두고 보자니 싫고, 사람들이 흩어진 이 도시에서는 어떤 생각과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 몰라서 이수는 기계와 함께했다. 언니가 기계를 두고 세상을 떠난 이후로 계속.


안타깝게도 기계의 모터와 발전기는 차갑게 식어있다. 기계의 날개도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 있다. 이수는 기계의 머리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모터, 발전기, 동력선 따위의 민감한 장치 부위가 있는 그 공간은 기계들의 소음으로 시끄럽고 훈훈해야 했다. 이수는 냉기와 침묵만 맴도는 공간에서 여러 장치와 톱니 사이를 살폈다. 가끔 어디서 왔을지 모를 쓰레기와 곰팡이가 기계를 공격해 오고는 했다.


그러나 이수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터의 엔진 상태를 나타내는 불빛이 아주 꺼져있었다. 쓰레기나 곰팡이 따위도 없었다.


명석하고 현명한 언니가 만든 기계인 만큼 기계는 이수를 크게 곤란하게 한 일이 지금껏 없었고 이수는 그럭저럭 기계와 공생해왔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기계는 이수에게 전기를, 정화된 공기를 주었고 이수는 기계에게 날아드는 새 시체 혹은 몇백 년이 지나고 썩지 않는 골칫덩이들을 빼내 주었다.


그런데 왜 어렸을 적 언니처럼 말썽 없이 묵묵히 날개를 돌려온 기계가 멈춘 건지. 두려움과 함께 가슴 아래에 진득이 얽힌 방향 없는 원망이 치밀었다. 기계가 그대로 없어져 버리길, 거대한 쇳덩이 따위 산산조각이 나버리길. 언젠가 했던 기도가 왜 하필 오늘에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이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지하를 찾았다. 기계의 배터리는 지하에 있어 사다리의 연속이었다. 기계에서 내려와 스틸 판 아래의 벙커로 향하기까지 이수는 디딤대를 잡고 딛는 일련의 행동을 다시 반복해야 했다. 팔다리를 조이는 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대로 지하 끝까지 더더 어둠을 뚫고 내려가야 했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이수는 마침내 어느 지면에 발을 디뎠다. 드디어 타워의 가장 지하로 내려왔다. 이수는 허리춤의 보조 가방에서 챙겨온 손전등을 켰다. 빛이 어둠을 갈랐다. 이수는 빛이 가리키는 장애물들, 이를테면 훅 튀어나온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 혹은 쥐의 시체 따위들을 조심스레 피하며 나아갔다. 기계의 심장이자 허파와도 같은 배터리는 더 어둠 속에 있었다.


곰팡이 냄새가 짙어질 때쯤 이수가 손전등을 들어 올렸다. 수많은 전깃줄과 배선이 얽히고설켜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곳을 향해 이수는 더 높이 올렸다. 그러자 거대한 원기둥의 모양을 한 기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수는 어둠 속을 더듬으며 그 기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문득 바닥으로 함부로 튀어나온 어떤 배선에 다리가 걸리고 이수는 그만 기둥을 껴안듯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코에 스치는 지하의 축축한 습기와 함께 어둠 속에서 숨죽여 지냈던 먼지가 기회를 틈타 이수에게 달려들었다.


시체를 껴안는 기분이었다. 기둥은 쇠 따위로 만들어진 탓에 전도가 잘되는 물질이었고 멈춰 선 배터리부터는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열 역학 제 2법칙에 따라 기둥의 냉기와 한기가 이수의 몸을 기어오를 뿐이었다.


즉 이수는 온몸으로 죽어버린 기계의 심장을 마주 안은 셈이었다. 그러니 시체를 안은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했을지도 몰랐다.


이수, 혼자의 힘으로 기계를 고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간단히 부서졌다. 드디어 이수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때껏 기계를 살피기에 급급해 인식하지 못했던 막막함과 공포를 자각하자 부서진 둑을 넘듯 그 어두운 감정들이 이수를 삼킬 기세로 쏟아졌다. 이수는 이대로 기둥을 껴안은 채 울음 한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갓 난 아이처럼 울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 기울어진 남산 타워에 있는 것이라곤 작동을 멈춘 기계와 이수, 이 둘뿐이었고 기계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밖에 흘릴 줄 모르는 아이가 아닌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명석한 수리공이었다.  

   

    




언니는 저명하고 훌륭한 과학자였지만 이수는 단 한 번도 그런 언니를 자랑스럽게 여긴 적이 없었다. 언니는 수줍음이 많고 다정하고 친절했다. 상대의 곤란함을 모른 척하고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세계에서는 불필요한 것들을 언니는 잔뜩 이고 있었다. 그래서 우기고 헐뜯고 다투는 일은 모두 이수의 몫이었다.


이번에도 언니는 이수에게 떠넘겼다. 기계를, 다시 핑크빛 먼지가 가득한 세계를, 언니가 남기고 간 죽음의 잔해들을.


이수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타워의 지하 1층 가장 안쪽, 예전에는 엔진실이었던 공간으로. 침대 위로 구겨진 침낭, 다급하게 나갔던 탓에 책상 아래로 떨어진 체인, 톱니바퀴, 전기줄 따위의 잡동사니들. 아침의 소동이 고스란히 남은 방 안을 이수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방 안을 대강 훑어보기만 해도 한 사람만이 사용하는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수의 것이 아닌 물건들은 모두 다락에 있다. 언니가 즐겨 입던 넥칼라가 늘어진 초록 카디건, 목적 모를 실험을 할 때 입던 흰 가운, 잔뜩 스크레치가 난 토끼 얼굴이 그려진 텀블러, 식기 따위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 기계의 매뉴얼 또한 그곳에 있었다. 이수의 방, 다락 창문 아래에 놓인 서랍. 언니의 유품들을 모아 넣은 상자 안에. 고집스러울 정도로 꼼꼼한 언니는 그 성경을 십분 발휘하여 자신의 부재에 대비해 매뉴얼을 남겨놓았다.


‘언니는 상관도 없는 남을 위해서 대체 어디까지 할 거야?’

‘…이수야.’


그 뒤에 언니가 뭐라고 했더라. 다락 위로 올라가는 나무 사다리 앞에서 이수는 생각했다. 여느 때와 같이 이수의 가시 돋친 시비조로 시작한 대화였다. 보통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이타심을 종용하는 언니의 설득으로 시작해 자신도 쉽지 않음을, 다 포기하고 숨어버리고 싶다는 억눌린 하소연으로 끝이 났다. 기계를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던 때였으니 언니 또한 몸과 정신 모두 지쳐있던 나날이었다.


그래서 이수는 언니가 정말 남을 위해 목숨마저 걸 수 있는 사람이었을 줄은 몰랐다. 다정한 사람과 헌신적인 사람은 다르다. 버섯 전쟁이 일어나기 전, 어렸을 적에 보았던 히어로 영화 따위에 나오는 주인공은 영화고 허구일 뿐이다.


스파이더 맨의 연인, 메리 제인이 그리 그에게 화내고 소리 지르던 이유를 이수는 그때 알 수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헌신해도 남은 건 결국, 매번 노심초사하며 홀로 남겨지는 메리 제인과 망할 타워 위의 쇳덩어리와 바깥에 눈처럼 내리는 먼지들뿐이다. 언니는 그저 다정한 사람이었어야 했다. 다정한 사람은 위선으로 그칠 뿐인데 헌신적인 사람은 목숨까지 내놓고 마니까.


그때의 언니는 뭐라고 했더라…. 이수는 굳이 케케묵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대신 다락으로 올랐다. 그것은 지금의 이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결국 도래한 핑크빛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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