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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난한 Jun 20. 2023

요란 속 핑크(3)_매뉴얼대로

* 본 소설은 실제 지명 혹은 단체와 관계없으며 모두 픽션입니다.


<요란 속 핑크>

세계 4차 대전 뒤 기울어진 남산 타워 위의 작은 소동. 이수의 이야기.


clouds of memory - monosleep

03. 매뉴얼대로


언니의 유품들 사이에서 기계의 매뉴얼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이수는 반짝이 스티커 여러 개가 붙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먼지가 이는 기분이었지만, 이수는 아직 방독면을 쓰고 있으니 괜찮았다. 


이수의 손이 거침없이 상자 안에 든 카디건, 흰 가운, 텀블러, 식기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곧 매뉴얼이 나타났다. 여러 종이 뭉치들을 제본한 것이었다.


이수는 매뉴얼을 펼쳤다. 매뉴얼은 기계의 구조, 작동 원리, 주의사항, 기능, 특징 등으로 장이 나뉘었다. 그 중, 주의사항 장의 가장 마지막 목차 하단의 ‘고장 시 확인 사항’이라 적힌 곳으로 종이를 넘겼다.   

  


 4-6. ‘2-8’번 (발전기, 동력선, 배터리 전원등 OFF)의 상태와 함께 휀에 어떤 이물질도 없으며 모터와 배터리에 어떤 열감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 아래와 같은 지시사항을 따른다.


1. S대학교 연구동 220동 지하 1층, 57-1동 사이. 박켈렌에게 나폴리 스파게티를 주문할 것.

2. 서울 종구 을지로 2가 777-34 무한철물점. 강철민에게 모판 3개를 살 것.

3. 서울 종로구 삼청로11길 40 북안산공원. 오두막. 서정한과 남산타워의 측면 기울기를 계산할 것.

4. 서울 마포구 굴레방로9길 19 17 아현 시장. 박순자에게 5인분의 식사를 부탁할 것.     



이수는 눈을 의심하며 ‘고장 시 확인 사항’ 페이지의 앞뒤를 뒤적였다. 그러나 ‘4-6’ 항목 외에, 다른 항목들은 ‘확인 사항’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 기계의 상태가 ‘4-6’ 항목에 해당되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폴리 스파게티? 모판? 그런 것들이 대체 이 기계를 다시 작동시키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준단 말인가. 이수는 언니를 매뉴얼 앞에 앉혀놓고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수에게 남은 것은 고장난 기계와 이 이해하기 힘든 매뉴얼뿐이었다.


이 매뉴얼을 작성하는 데에 언니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이수는 알았다. 언니는 보기보다 겁이 많고 치밀한 사람이었으니까. 언니가 없는 3년 동안 다른 별 탈 없이 곧장 휀을 돌려온 기계가 그것을 증명했다.  

   

‘…이수야. 넌 몰랐겠지만 난 네가 부러울 때가 있어.’


그때는 새벽이었고, 이수와 언니는 한 방에서 잠자리를 공유했기 때문에 그 목소리는 잠결에도 선명했다. 이수의 일방적인 날 선 시비조로 그날 자매는 어색한 공기 속에서 이부자리를 폈다. 그래서 등을 돌린 채로 이수는 꼼짝 않고 눈을 감았다.


‘오늘 철물점 아저씨가 기계를 때려 부수겠다며 망치 들고 왔을 때, 난 아저씨의 말에 흔들리기만 했어. 아저씨 말대로 내가 모두를 힘들게만 하는 게 아닌가. 이 기계가 실패하면 모두의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는 건데….’


등 뒤로 언니의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이수는 끝까지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언니는 왜인지 그녀가 듣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아저씨가 망치를 내려치기 직전까지 나는 고민하기만 했는데, 넌 아니었어. 어디선가 키만 한 파이프를 들고 와서 아저씨 앞을 막아섰지.’


혹여 독기 서린 공기가 들어올까 창틀에 에폭시가 잔뜩 칠해진 창에서 푸른 새벽빛이 새어들어왔다. 새벽빛 아래로 훅 먼지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서야 이수는 언니가 잠을 청하기 위해 이불을 끌어 덮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망설일 때 넌 항상 주저하지 않았지. 넌 강한 애야. 이수야.’   

  

잠결에 들은 탓에 또렷하지도 않는 그날의 기억이 왜 지금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지하의 다락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이수가 든 플래시 라이트가 전부였다. 라이트를 비추지 않으면 손을 뻗어도, 걸음을 옮겨도 어둠, 어둠뿐이다. 하지만 타워로 보금자리를 옮긴 후부터 이수에게 어둠은 몸에 붙어 익숙했다.


세상과 용이하게 단절해 주는 점에서 어둠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공평했다. 고립과 폐쇄를 기꺼이 선택한 이수에겐 어둠은 길을 잘 들은 신발처럼 알맞았다.


그래서일까. 이수는 그 빛 한 줄기 없는 지하의 다락에서 웅크리고 있는 중에도 그녀가 뭘 해야 하는지 또렷한 어둠을 마주하듯이 알 수 있었다.      


짐을 싸는 데 이수는 큰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일주일 치 식량과 물, 여분의 방한복, 파이어 스틱, 파라코드, 나침판. 필요한 물건들만을 챙겨든 이수는 묵직한 가방을 들쳐 메고 타워의 지하를 나섰다.


지하를 나선 것만으로도 빛이 두 팔 벌려 이수를 환영했다. 이수는 빛보다 어둠에 가까운 사람인데 이상했다. 로비의 창가를 투과하는 그 빛이 정말로 그녀를 반기는 듯했다.


이수는 이전에는 카페와 갤러리 따위가 있었던 공간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제는 기계의 크고 작은 장치들이 빼곡히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 어딘가에서 커피를 내리고 그림을 걸고,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이 사람을 만나 웃고 떠들었다.


그래, 그랬던 때가 있었다. 목적 없이 일상을 나누는 일이 당연했던 때가. 언니는 그런 세상에 어울리던 사람이었다. 언니는 어떤 재앙이 도래해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으며 구원 또한 그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쇳덩어리들 사이를 지나니 T1층의 입구 그리고 매표소가 나왔다. 분홍색의 먼지는 여전히 집요했다. 꽃 같은 것들이 눈처럼 고요히 쌓이고 있었다. 도시를 아주 덮어버리겠다는 재앙의 의지가 느껴졌다.


이수는 매표소 뒤편의 천막을 거둬냈다. 그 아래로 그녀의 나이만큼이나 연식이 된 스쿠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수는 키를 꽂으며 생각했다.


언니의 다정과 친절을 믿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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