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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주사위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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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혁 Nov 09. 2024

SF 단편소설 - 주사위

05



다시 이차원 종족의 비유로 시작하자. ‘2’ 라는 숫자를 평면에 적었을 때, 동일한 평면에 존재하는 존재가 이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더라도 계속하여 하나의 선만이 보일 것이므로, 문자에 조작을 가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문자가 쓰인 종이를 반으로 자르거나, 몇 번 더 자르더라도 그들에게는 여럿의 더 짧은 선만이 보일 것이다. 이것이 주사위 원본을 이용했던 연구자들이 했던 행동이다. 단순히 자르기만 해서는 주사위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이차원 종족이 의도를 가지고 이차원의 종이를 무수히 많이 분할한 상황을 가정하자. 가령, ‘2’ 에 무수한 가로선을 그어 분할한다면, 가장 밑의 선은 검은 색으로 가득 차 있을 테고, 그 위부터 한동안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검은 점이 찍힌 흰 선이 나타날 것이다. 그 뒤로는 양쪽에 찍힌 검은 점이 점점 중앙으로 모이다가, 가장 위에서는 한 점으로 수렴한 점이 존재할 것이다.

이 인식 과정을 이해하였는가? 이 비유를 다시 주사위에 대입하기 위해 차원의 개념을 얹는다면, 충분히 얇아진 종이, 즉 ‘정보’는 일차원에 수렴하는 선이 되어 이차원 종족이 수집할 수 있도록 변하였다. 

즉, ‘삼차원 종족’인 인간 역시 삼차원 정보인 주사위를 이차원의 면으로 분할하여 ‘본’ 뒤, 얻어낸 정보를 종합하여 주사위를 해독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일 년 간 네 개의 주사위에 대해 위의 작업을 수행하였다. 주사위는 더 이상 예전과 동일한 가치가 있는 연구 대상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정부의 자산이자 관리 대상이었으므로, 주사위의 유체성 덕분에 연구를 시도한 뒤 훼손 없이 복구할 수 있다며 정부를 설득한 끝에야 그것들을 대여할 수 있었다.

앞서, 주사위가 외계 종족의 문자라는 주장이 대부분 맞으나 완벽하지 않다고 적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의사소통의 수단이었으나, 결코 문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통의 매개체가 저장할 수 있는 정보량은 그것이 존재하는 차원이 증가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주사위 역시 그것에 함축된 정보량은 초기의 예상을 몇 배나 상회하였다. 그럼에도, 다섯 개의 정육면체만으로 외계 종족의 문자 체계를 이해시키고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까지 포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그림이었다.

정확히 하자면, 그림조차도 이차원에 그려진 정보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입체적인 영상을 삼차원에 투영한 무언가에 가깝다. 그러나 이 글은 그것을 ‘그림’이라고 단순화하여 표현한다.

주사위에 새겨진 그림은 숫자 ‘2’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해상도가 높았다. 이는 정확한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이차원으로의 분할을 시행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당초 예상한 것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그만큼 더 구체적인 정보가 ‘그려진’ 것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네 개의 그림을 추출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였다. 

첫 번째 그림에는 인간 세상의 물리학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중력을 발견했고, 에너지를 이용하여 스스로 운동하는 기관을 만들었으며,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입자들을 충돌시키고 융합했다. 그 과정에서 세상은 더 빠르고, 편리하고, 복잡하게 발전해 나갔다. 그림의 끝자락에는 나같은 물리학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는 대중이 여럿 등장했다. 온갖 기술을 만지작거리는 이들의 표정에서 한없는 순진무구함이 느껴졌다.

나는 주사위가 유발하는 감정이나 느낌 등을 단순히 주관적인 해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됨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못해 객관성의 수준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조차 외계 종족이 의도한 것이라면, 단순한 묘사뿐 아니라 그 과정과 소감까지 빠짐없이 기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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