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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은그림 Apr 02. 2022

코로나19 확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매일 뉴스에선 늘어나는 코로나 확진자에 대해 보도하지만 늘 남의 일처럼 여겼었다.

백신도 맞았고 사람들과의 교류도 없으니 내가 코로나에 걸릴 확률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는 확진자가 늘어 우리나라 국민 5명 중 한 명 꼴로 걸린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그 확률에 내 가족 내 지인들은 포함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는 동생이 그 확률에 딱 걸리고 말았다.

백신 3차까지 맞았는데도 말이다.

컴퓨터 방을 자가 격리 공간으로 정하고 칩거에 들어간 확진자 동생. 


70이 넘은 노년의 아빠가 코로나에 걸린 동생의 자가 격리 수발을 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내가 코로나 소굴(?)에 자처해서 들어가게 됐다.


확진자의 아침, 점심, 간식, 저녁을 따로 챙기고 나는 아빠와 같이 식사했다.



실내에서도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수시로 손 소독은 물론 확진자의 손 닿은 곳 소독 등 나름 감염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자가 격리하는 확진자의 가족은 2~3일 내에 PCR 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해서 동생이 확진되고 이틀 뒤 아빠와 나는 PCR 검사를 받으러 갔다.

다음 날 문자로 결과를 받았는데 아빠는 확진이었고 나는 음성이었다.

그동안 컴퓨터 방에서 답답했던 동생은 비로소 방문을 활짝 열고 확진된 아빠와 지내게 되었고, 나는 홀로 작업실로 오게 됐다.     


그날 저녁부터 콧물이 나왔는데, 평소 비염이 있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의 콧물이었다. 게다가 밤에 잘 때는 으슬으슬 춥기까지 했다.

PCR 검사는 음성이었는데 대체 이 증세는 뭐지?

아빠 집에서 나올 때 동생이 혹시 모르니까 하며 챙겨준 종합감기약이 있어 먹으려다가 왠지 거부감이 생겨 안 먹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PCR 검사를 받으러 갔다.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까 봐 집에서 검사소까지 여섯 정류장을 걸어갔다가 걸어왔다.

처음엔 엄마 병원 입원할 때, 엄마 장례식 마치고, 동생이 확진되고 그리고 이번까지 총 4번의 PCR 검사를 받았는데 받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찌를 때마다 아프고 도통 적응 안 되는 검사다. 

PCR 검사받고 오는 길에 약국에서 생긴 게 무난한(?) 다른 감기약을 구입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확진 문자를 받았다.     

그날로 확진자가 된 나는 우선 밥을 잔뜩 해놨다. 집에서 가져온 김치랑 마른미역이 있어 미역국에 김치를 먹으며 매 끼니를 때웠다. 확진 후 자가 격리 중에는 밖에 나갈 수 없었는데, 먼저 확진돼 일주일 자가 격리가 끝난 동생이 퇴근 후 이번에는 나를 챙겨주러 들렀다.


등산 짐 가방을 지고 온 동생은 내가 필요하다던 물과 휴지 말고도 먹을 걸 잔뜩 챙겨 왔다.



이런 세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마스크 써', '문 좀 닫아' 하면서 까칠하고 냉정하게 대했던 내가 조금 미안해졌다.     


코로나 증상은 감기랑 비슷했다. 나는 예전부터 감기에 잘 걸리지 않았을뿐더러 걸리더라도 ‘약 먹어도 일주일, 약 안 먹어도 일주일’이라는 감기 투병 기간을 믿었기 때문에 약은 안 먹으려고 버텼다. 

하지만 안 먹을 수가 없었다. 으슬으슬 추우면서 덥기도 하고, 목에는 가래, 코에는 콧물이 꽉 막혀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상한 몸 상태를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 결국 사온 종합감기약을 먹기 시작했다. 사실 동생이 확진된 후 아빠가 확진된 것을 보고 ‘그다음엔 어쩜 나일 수도 있겠구나’ 예상했었다.

백신을 맞았으니 그냥 감기약 먹고 버티면 지나가겠지 하고, PCR 검사도 안 받고 집에서 혼자 칩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점점 내 몸 상태가 이상해 이러다 내가 사망해도 아무도 모르겠다 싶어 스스로 PCR 검사를 받으러 간 것이다. 내 정보를 나라에서 관리하면 혹시나 모를 내 사인(死因)을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만큼 내 몸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나라에서는 오직 문자로만 나를 관리하고 있었다. 



오직 나 스스로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동생이 챙겨준 일용할 양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종합감기약으로 증상을 다스리며 홀로 일주일을 보냈다. 동생의 자가격리 수발 포함 2주간의 격리생활이 비로소 끝났다.

어느새 봄꽃들이 환하게 피어있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웠다.

거리에서 나는 누가 봐도 한동안 격리당하고 나온 사람의 모습이었다. 


우리 가족은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코로나 후유증과 함께였다.

나아지고 있는 중이지만 코와 목이 여전히 답답하고, 한번 기침이 나오면 멈추질 않았다.

안 걸렸으면 좋았을 코로나.

결국엔 걸려버렸지만 또다시 걸리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온 국민이 모두 걸려야 코로나가 끝이 난다고 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안 걸리는 게 상책이다.


모두 코로나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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