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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올가미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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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지아 Jun 21. 2023

너는 내아들과 결혼한 게 너의 인생에서 최고의 복이다

시모가 매일같이 했던 말

그녀는 결혼 전부터, 이혼을 할 때까지 항상 저 말을 내게 했다.


내 아들이랑 결혼한 것이 너의 인생에서 니가 받는 가장 큰 복일거라고.

내 아들같은 남자랑 사는 너가 부럽다고.

너는 너무 좋겠다고.


그녀는 본인의 아들이 완벽한 남편이라고 내게 강조했고, 그런 아들을 가진? 나에게 항상 저 말들을 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녀는 본인이 살고 싶어하는 큰 아들과 평생 같이 살고 싶어했다.

결혼을 시킨 후에도 같이 살기 위해 계획을 짜 두었으나, 우리가 분가를 결정했고 그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분가를 결정한 대신 조건이 있었다.


결혼식 전 2달동안 최소 이틀에 한번은 예비시댁에  찾아와 시부모와 친해질(?) 것,

결혼식 후 2주동안 며느리인 나 혼자 그 집에서 시부모와 함께 살며 살림을 배울것,

(이건 결혼준비하며 시모가 미친여자임을 알게된 내가 남편에게 사정해서 결국 1주일로 줄였다)

그리고 강원도에서 신혼살림을 하며 매주 본인들을 보러올 것.


 ㅡㅡㅡㅡㅡㅡㅡ


결혼식 전 2달동안 하라는건 지켰다.

그리고 그 다음이 남아있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일주일간 시부모 집에서 나 혼자 지내기로 했다. 남편은 훈련을 들어가야하니 나 혼자라도 며느리 된 도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본인들의 가풍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개룡남인 시부와 시모는 본인들이 근간이 없어서 뭐든 있어보이길 원했다.)


나는 일주일동안 매일 아침 한복을 입어야 했고, 6시 45분부터 시부의 아침 준비를 해서 7시반에 아침을 먹는 시부를 배웅해야 했다.

 올빼미 체질이었던 나는 새벽기상이 힘들어 차라리 6시반까지 밤을 새기도 하며 버텼는데,

그러다 하루아침 못일어난 날이 있었다.

그러자 시모는

"시아버지 출근하실때까지 자는 며느리는 처음봤다. 너희 친정에선 그렇게 가르치셨니?"

하며 친정을 모욕했다.


그러다가 내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날 보는 그들은 익숙한 듯 보였다.

결혼전부터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는 공황장애라는 병명을 그때부터 갖게 되었고, 그건 그 집안의 시동생이 10대부터 갖고있던 병명이었다. 그들은 그랬기에 거품물고 쓰러지는 내 모습이 익숙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 대하는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힘들어하는 며느리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고, 며느리로서의 도리만 강조하는 그들을 버티며 일주일이 지났다.


 시부모는 우리를 앉혀두고 서로 호칭을 바꾸길 종용했다.

대외적으로는 남편과 아내란 호칭으로 서로 부르고, 아이가 생기면 xx아빠, xx엄마란 호칭으로 부르며 대외적으로는 xx애비, xx애미라는 호칭을 써야한다고 미리 결정짓고 꼭 지키길 강요했다.

서로간 부르는 호칭은 여보라고 해야하며, 현재 남편이 날 이름으로 부르는것과 내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도 금지했다.

왜 우리 부부가 서로 다정하게 서로가 원하는 호칭을 못하도록 하는것인지,

왜 우리끼리 정할 것들까지 그들이 정하고 명령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부부는 결혼 직후부터 호칭또한 바꿔야 했다.



법무관인 남편의 사정으로

우리는 강원도의 낡은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대신 매 주 서울의 시가를 가서 하루 자고 함께 그들의 교회에 가야 했다.

성격이 털털한 나는, 하루 자는건 괜찮았지만

새벽에 일어나는것이 고역이었다.

하루라도 못 일어날 시 시모가 비꼬는 친정부모에 대한 모욕과 눈빛이 너무나 고역이었다.

매 주 시가에 가는것이 스트레스였다.


시모는 지능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본인의 아들을 두려워했고, 그랬기에 아들 앞에서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했다.


매 주 방문할 때마다 우리는 항상 뭔가를 사들고 시댁에 갔었다.

그럴때마다 시모는 남편 앞에서

"너희 돈도 없는데 이런거 사오지 마라,

이런거 안 사와도 괜찮다"


라고 말했고,

그걸 곧이곧대로 들은 우리는 그 다음주엔 빈손으로 시댁을 방문했다.

그러자 시모는 식사준비를 하는 부엌에서

내게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나이 이때껏 시댁은 물론이고

친정어머니 뵈러갈 때도 빈손으로 한번도 간 적 없다. 부모집에  찾아갈 때는 빈손으로 가는게 아니다. 너희 부모님이 그런건 안 가르치셨니?"


너무 모욕적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 주, 매 번 시가를 갈때마다 뭔가를 강박적으로 사가게 되었고, 나는 물론 친정까지 욕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나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 앞에서 시모는 그런거 필요없다고,

군인인 너희 형편에 이런거 사오지 않아도 된다며 자애로운 척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나중엔 시모의 그런 이중적인 말들을 녹음했었으나,

이때는 너무 당황하고 충격적이어서,

그런 못되고 치밀한 여자를 세상에서 처음 알게되어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의 신혼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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