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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마루 Apr 07. 2022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데칼코마니

이미지 출처_https://pin.it/2lb8goy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서른 즈음에 만난 당뇨 때문에 좋아하지 않던 운동을 시작했다. 가벼운 걷기에서 시작해서 달리기, 수영, 등산을 즐기다가 이 모든 운동의 장점을 모아 놓은 자전거를 배우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은 지역을 발견했고, 결국 이사까지 결심하게 되었다. 이사는 17년 만의 일이라, 떨리고 두려웠다. 또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고 있는 집을 내놓은 다음 살고 싶은 집을 구하는 게 먼저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하는 게 맞는지, 잘 몰라서 우왕좌왕하다가 좋은 조건의 집을 다른 사람들에게 뺏기고 말았다.

 아이들에게 '이사 갈 거야!'라고 말한 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살 집도 구하지 못했다. 첫째는 '엄마, 아빠는 이사 갈 집도 안 구하고 이사 간다고 하셨던 거예요?'라고 말하고, 둘째는 '이사 못 가겠네요.'라고 한 마디 흘렸다. 안 그래도 마음이 힘든 데, 가장 가까운 아이들까지 '안 될 거라는' 부정적인 말을 보태니 속에서 화가 올라왔다. 나는 남편에게 '우리 정말 이사 갈 수 있을까요? 여기서 1년만 더 살고 올해 11월에 괜찮은 집이 나오면 그때 다시 알아볼까요?'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남편이 나의 말에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도 이사 갈 집은 많아요! 다만 당신과 아이들의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면서 값도 착한(?) 집이 없어서 그렇죠." 남편의 말은 결국 나와 아이들의 마음에 쏙 드는 집이 없다는 뜻 아닌가? 경기도 동북부로 가고 싶은 나의 욕심을 내려놓으면 우리 4 식구가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는 집이 보일 수도 있겠네? 나는 '여기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다시 집을 찾아봤다.

 성경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구절이 있다. 남편과 나는 아침, 저녁으로 부동산 앱을 두드렸다. 우리가 처음에 정한 조건의 집을 사방팔방으로 찾아봤다. 하늘이 우리 두 사람의 노력을 가상히 여겼던 것일까. 역세권이라 아이들 통학에 편하고, 신축이라 집도 깨끗하고, 지금보다 더 넓고, 시세까지 좋은 집이 눈에 띄었다. 나와 남편은 다른 사람에게 뺏길세라 다음 날 오전 11시에 중개업자를 만나서 좋으면 바로 계약하기로 했다.

 다음 날, 중개인을 만나서 집을 살펴보고 계약을 하려던 찰나 문제가 생겼다. 어제저녁 집주인이 다른 중개인을 통해 이 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버린 것이다. 그러면 미리 연락이라도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주인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전화로 받고 바로 계약금의 일부를 받아서 오늘 11시에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깜박했다며 미안하다는 말 대신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상심이 컸지만 '우리보다 더 급한 사람이 있었구나. 어쩔 수 없지' 생각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중개인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었는지 집주인에게 전화로 '오늘 오신 분들과 계약을 맺는 게 더 이익인데 왜 그러셨어요'하며 어제 술김에 맺은 계약을 파기하도록 은근히 종용했다. 집주인은 '그러면 내가 계약을 파기하고 오늘 집을 보러 온 사람들과 계약을 다시 맺을 테니 위약금의 절반을 그 사람들이 지불할 수 있는지, 한 번 물어봐 달라'라고 했다. 아쉬우면 자기가 위약금을 물고 우리와 계약을 다시 맺어야지, 우리 보고 위약금의 절반을 물라니, 정말 화가 났다. 나와 남편은 '됐어요' 하고 그 집을 나왔다.

 중개인은 눈앞에서 큰돈이 날아가는 게 못내 안타까웠는지, 우리를 붙잡으면서 다른 집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나와 남편은 '괜찮습니다.' 하고 근처 카페로 갔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카페에서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남편의 핸드폰이 울렸다. 조금 전에 우리를 붙잡았던 중개인이었다. 중개인은 '자신이 집주인의 마음을 돌려놓을 테니 한 번만 더 생각해 달라'라고 했다. 남편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조건을 생각하면 아쉬웠지만, 중개인과 집주인의 됨됨이를 볼 때 계약이 불발된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래도 감정적으로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올해 초에 좋은 조건의 집들이 쏟아져 나올 때 앞뒤 재지 않고 계약을 했어야 했다'며 나는 남편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늘 하던 대로 부동산 앱의 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그런 남편 옆에서 나도 다시 힘을 내서 부동산 앱의 문을 두드렸다.

 그날 저녁 남편과 내가 바라고 바랬던 조건의 집이 눈에 띄었다. '어? 어제까지는 없었는데 오늘 저녁 갑자기 나왔네?' 나와 남편은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고 다음 날 아침 바로 부동산에 전화를 해서 매물을 확인하고 점심에 찾아갔다. 어제 봤던 집보다 평수도 조금 작고, 사용년수도 오래되었지만 그것 말고는 다 좋았다. 무엇보다 중개인이 일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친절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일처리 하나는 매끄럽고 명확했다. '중개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에서 할 수 있는 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중개인과 집주인이 통화하는 것을 옆에서 들은 것으로만 판단할 때 집주인도 말이 통하는 상식적인 사람 같았다.

 남편은 몇 가지 서류를 확인하고 계약금의 일부를 주인 계좌로 이체했다. 일주일 뒤 집주인을 만나서 본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약속하고 우리는 사무실에서 나왔다.  실장님이 우리 뒤를 따라 나오시더니 '역까지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며 앞장에 서서 길을 안내해 주셨다. 어제는 무례한(?) 사람들을 만나고 상심이 컸다면 오늘은 상식적인 사람들을 만나고 흐뭇했다. 하루를 두고 지옥과 천국을 오간 기분이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수직 상승했다가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져 결국에는 원래 자리로 되돌아온 느낌이라고나 할까.


 데칼코마니, 더 가까워진 국토종주의 꿈

 이사까지 2주가 남았다. 이사업체를 선정하고, 묵은 짐들을 내다 버렸다. 1년 이상 사용하지 않은 물건은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나 팔거나 버렸다. 가끔 내가 가고 싶었던 곳으로 가지 못한 아쉬운 감정이 올라왔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통학하기에 이곳이 더 좋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또 작년에 국토대장정 연습을 목적으로 2번 정도 찾은 파주 평화누리 코스와 공릉천, 창릉천 자전거 길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옥수에서 동북부
옥수에서 서북부

 옥수를 기준으로 동북부 방향으로 가면 팔당대교가, 서북부 방향으로 가면 행주대교가 있다. 내가 자주 가는 코스는 팔당대교 방향이었다. 팔당대교를 지나면 북한강 자전거 길과 남한강 자전거 길이 나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다. 작년에 자전거를 배우고 남편과 함께 북한강 자전거 길을 따라서는 춘천까지, 남한강 자전거 길을 따라서는 여주보까지 다녀왔다. 강을 따라 달리는 기분이 너무 상쾌하고 황홀해서 이사도 경기도 동북부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처음 계획과 다르게 경기도 동부북의 반대편, 서북부로 가게 되었다. 행주대교와 팔당대교는 방향만 다를 뿐 옥수에서 거의 같은 거리에 있다.

위 두 개의 사진을 합치니 대칭적인 무뉘가 나온다

 종이에 물감을 발라서 두 겹으로 접었다 펴면 작가도 예측하지 못한 대칭적인 기묘한 형태의 무늬를 얻게 된다. 인생 도화지에 내가 그린 그림은 경기도 동북부로의 이사였다. 그런데 외부의 힘에 의해 나의 의도가 꺾이고 상심한 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정반대 편에 더 좋은 조건의 집이 나와 있었다. 그림으로 그리면 나와 남편도 생각하지 못한 대칭적인 형태의 무뉘가 나온 것이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우연이라고 할 것이고,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필연이라고 할 것이다. 우연이면 어떻고, 필연이면 어떤가. 지도에 나타난 그림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올해 내가 세운 목표 중 하나는 '자전거 타고 국토 종주'이다. 인천에서 부산을 잇는 자전거 국토종주 코스는 600km가 넘는, 4박 5일 일정의 긴 여행이다. 옥수에서 아라서해갑문까지 가려면 50km를 달려야 한다(주중 출발의 경우. 주말에는 지하철로 이동 가능). 그런데 경기도 서북부로 이사를 가면서 15km가 단축됐다. 실제 거리로는 15km이지만 체감상으로는 30, 40km 이상 가까워진 느낌이다. 원래 계획대로 경기도 동북부로 이사를 갔다면 아라서해갑문에서 80km가량 멀어진다. 그런데 서북부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아라서해갑문까지 거리가 35km로 단축되었다. 상상으로 잠시 동북부 지역으로 이사를 가서 거리를 계산해 봤을 뿐인데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의 뇌는 상상을 실제로 받아들여서 '목표 거리까지 45km나 단축되었다'라고 느끼는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목표는 목표일 뿐이다'라고 믿고 살았다. 내가 상상했던 일이 이루어진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에 '자전거 타고 남산 오르기', '브런치에 작가 신청하기', '이사'라는 3가지 목표를 세웠다. 앞에 2개는 작년에 이루어졌고, '이사'는 곧 이루어질 예정이다(이 글을 쓰고 있는 날로부터 일주일 가량 남았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도,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고 글을 쓰는 것도, 이사도 다 처음이라 어렵고 힘들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절박하고 간절했다. 그랬더니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진 그림이 그려졌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그림과 닮은 듯 다른 그림이, 보면 볼수록 더 마음에 드는 그림이 그려졌다.

 나는 지금도 매일 5년 후, 1년 후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멋진 그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내가 가진 물감과 도화지를 가져가 자기 멋대로 그려놓고 '이게 너야'라고 강요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 싶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면 뭐라도 그리자. 일단 시작하자. 상상력을 발휘해서 5년 후, 1년 후, 3개월 후 나의 모습을 그려보자.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면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찾아보자. 그리고 그대로 따라서 그려보자. 그러면 내가 상상했던 일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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