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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루 Apr 30. 2024

브라이스, 독서에 눈뜨다.

케일럼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책장으로 직행했다. 다섯살인 아이는 아직 글을 읽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보기를 즐겼다. 글을 모를 경우 책 속의 삽화를 보며 줄거리를 유추하거나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한다. 케일럼도 비슷한 방식으로 책을 보는 것일 테지만 책을 유희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림보다 글이 많은 책을 골라 잡았을 때조차 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책장을 넘겼기 때문이다. 글을 읽지도 못하는데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책읽기를 좋아하다니 신기하다. DNA에 활자에 이끌리는 특수한 유전자가 박힌 채로 태어난 것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늘도 케일럼은 책을 한 권 뽑아 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평상시 아이는 또래와 별 다를 바 없지만 책을 읽을 때만큼은 확연히 다른 모습이 된다. 한자리에서 기본 삼십 분 이상 집중하여 혼자 책을 다. 글을 깨우치면 아이는 더 열렬한 독서광이 될 것이다. 어휘력이 풍부해져 말도 훨씬 조리 있게 잘 하겠지. 문학소년으로 유년기를 보내고 나면 아이는 지적이고 섬세한 청년으로 자랄테다.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책 보는 케일럼 옆을 얼쩡거리는 의외의 인물이 하나 있다. 생전 책장 근처를 얼씬거리는 꼴을 본 적이 없는 소년 브라이스다.

브라이스는 미취학 남자아동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 못 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강도가 미세하지만 매일 발전하는 중이었고 사고 치는 횟수도 점점 늘고 있었다. 브라이스가 한자리에서 일정시간 집중할 때란 대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유튜브나 넷플릭스 따위의 영상을 볼 때뿐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브라이스는 케일럼을 무척 따랐다. 단순히 따르기를 넘어 거의 집착하는 수준이었다. 온종일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입에 "케일럼!"을 달고 살았다. 케일럼은 그런 브라이스를 밀어내는 법은 없었지만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추종에 대해서도 아무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런 쿨한 행동이 브라이스로 하여금 더욱 안달이 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에는 관심 없는 브라이스는 케일럼에게 다른 놀이를 하자고 채근했다. 케일럼은 이미 책에 푹 빠져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러 번 조르는데도 친구가 꿈쩍하지 않자 브라이스도 포기한 듯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앉았다. 아이는 책을 펼치기는 했으나 시선은 여전히 케일럼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케일럼이 책장을 넘기면 따라서 책장을 넘겼다. 다 본 책을 책장에 갖다 놓고 새로운 책을 골라 잡을 때도 똑같이 했다. 케일럼은 가끔 흥미를 끄는 그림을 만나면 그제야 고개를 들고 자신의 추종자를 향해 "이것 좀 봐!" 하며 말을 건넸다. 브라이스는 가까이 다가가 그가 가리키는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케일럼이 그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자기만의 해석을 늘어놓자 브라이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그런 상황은 몇 번 반복되었다. 어느 순간 브라이스는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책의 그림을 주의깊이 보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집어든 책은 다행히도 히어로가 주인공인 일종의 아동용 코믹북으로 작은 칸에 그림이 연달아 그려져 있었다. 아이는 찬찬히 그림을 들여다보며 책장을 넘겼다. 페이지를 넘겼다가 뭔가를 확인하듯 앞 페이지로 돌아가 되짚어 보기도 했다. 브라이스는 더 이상 케일럼만 쳐다보며 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았다.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책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어린아이에게 독서를 하게끔 가르치기란 어렵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브라이스는 운이 좋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친구가 책을 좋아하는 성향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만약 케일럼이 친구를 이유 없이 때리는 질 나쁜 아이였다면 브라이스는 주먹 휘두르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케일럼이 책을 사랑하는 아이여서, 브라이스가 추종하는 대상이 다른 아이가 아닌 케일럼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둘이 이대로 쭉 친하게 지낸다면 말썽쟁이 브라이스도 어쩌면 케일럼과 함께 문학소년의 길을 걷게 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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