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새벽부터 콘도 수도관에 문제가 생겼다. 난데없이 흙탕물이 나온다. 어제 소화전 검침을 한다고 잠시 단수가 됐었는데 그 작업과 관련 있는 것 같다. 이 나라의 일 처리는 느려터진 데다 주말까지 껴있으니 물을 언제 쓸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나는 수도에서 흙탕물이 나오는지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다. 언니가 들어와 깨운다. 렉센터 샤워장에 가서 씻고 오자는 것이다. 왜 꼭두새벽부터 가야 하냐고 물으니 8시 전에 끝내고 돌아와야 된다고 한다. 렉센터에 무슨 행사가 있어서 그 시간 이후부터 주차가 통제된다는 공지가 사이트에 떠 있단다. 형부는 자신은 하루 씻지 않고 버티겠다며 도로 자러 들어가 버린다. 귀찮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씻지 않고 온종일 버티기는 자신이 없다. 별수 없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언니를 따라 집을 나섰다.
캐나다는 동네마다 시에서 운영하는 레크리에이션 센터(Recreation center)가 있다. 줄여서 렉센터라고 한다. 도서관, 체육관, 수영장, 아이스링크 등을 갖춘 복합문화체육공간을 말한다. 도서관을 비롯한 몇몇 시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수영장과 헬스장, 그룹 운동 수업을 수강하는 것은 유료다. 가격은 저렴하다. 성인의 경우 하루 이용권은 7불 남짓이고 월 또는 연간 이용권을 끊을 수도 있다.
토요일 새벽 6시 반, 수영장과 헬스장에는 이미 사람이 꽤 많다. 주말이라 텅텅 비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세상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참 많구나 싶다.
서둘러 샤워를 끝낸다. 샤워장과 탈의실은 그다지 쾌적하다고 할 수 없다. 딱 샤워만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집에서 챙겨간 수건과 헤어드라이어를 꺼낸다.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머리를 말리려니 한숨이 나온다. 여기저기 물기가 흥건하다. 화장대 위도 깨끗해 보이지 않아 물건 올려두기가 영 꺼림칙하다.
샤워장에 입장했을 때 에어로빅인지 요가인지 그룹 운동 수업을 마친 중국인 아줌마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었다. 같은 시간에 샤워를 하러 들어갔으니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시간도 비슷하다. 탈의실은 아줌마들이 중국어로 떠드는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로션을 얼굴에 대충 바를 뿐이지 나와 언니처럼 헤어 드라이기를 챙겨 와 머리를 말리는 사람은 없다. 아줌마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젖은 머리에 수건을 둘둘 감싼 채로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간다. 나와 언니는 약간 놀랐다. 왜냐하면 서양권 문화에서 그런 꼴로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에 수건을 감싸고 집에 가서 말리면 편하고 간단할 일이었다.탈의실에서 주차장까지의 동선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를 마주친다면 좀 민망하겠지만 운이 좋으면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다. 중국아줌마들처럼 나와 언니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말았다. 탈의실을 나가는 서너 명의 중국아줌마들 꽁무니에 슬그머니 붙는다. 머리에 수건을 만 여자들이 한 번에 우르르 빠져나오는 꼴이 우습다. 프런트를 지날 때도 직원들은 이런 모습에 익숙한지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차장에서는 저마다 흩어져 각자의 차에 올라탄다. 일사불란한 군대 같다.
집으로 운전해 돌아오면서 "역시 아줌마는 대단해" 한마디 했는데 언니가 "야, 우리도 아줌마야"라고 대꾸한다. 듣고 보니 언니 말이 맞다. 마흔을 넘긴 데다 머리에 수건을 둘둘 감싸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으니 중국 아줌마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젊은 아가씨였다면 꿋꿋이 탈의실에서 머리를 말리고 나왔을까? 그러니까 이십년 전 이십대의 젊은 나였으면 이러지 않았을까? 과거의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가 궁금했다. 아줌마가 되는 일은 너무도 먼 미래 같아서 영원히 오지 않을 줄 알았다. 항상 아가씨로만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과거의 젊은 내가 낯설다.
머리를 수건에 만 채 돌아다니는 모습은 아름답진 않지만 무척 편했다. 이러나저러나 편한 게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