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사거리 번쩍이는 네온사인 아래를 걸으며 문득 내 방을 떠올렸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하얀 이케아 책상과 녹색 체크무늬 커버가 씌워진 바퀴 달린 의자와 발 밑에 닿는 늙은 개의 더운 콧김을 떠올렸다.
한국 땅을 밟은 지는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다. 2주 뒤면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갈 터였다. 더구나 나는 낯선 타지에 살면서 내내 고국을 그리워했었다. 그리워마지 않던 곳에 와서 외국땅에 두고 온 골방 따위를 떠올리다니.
돌이켜 보면 언제나 그랬다. 떠나온 것, 지나간 것, 사라진 것에 미련을 두곤 했다. 반면,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지 않기, 현재를 음미하기, 닥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기, 이런 일은 늘 어렵게만 느껴졌다. 해 보려고 무던히 애쓰는데도 잘 되지 않았다.
부유하는 먼지 같다.
이 문장을 떠올렸을 때 나는 번잡한 백화점 지하 식당가에 앉아있었다. 번호가 적힌 종이를 손에 쥐고 전광판 속 발광하는 붉은 숫자가 떴다 사라지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저 주문한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고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랬다.
다음에 떠오른 문장은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 였다. 어쩐지 쓸쓸했다.
익숙한 고국을 여행자의 신분으로 방문할 때마다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든다. 돌아가야 할 집이 타국에 있다는 사실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각각의 나라에서의 나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의구심이 든다. 사실 아무 상관이 없다. 어느 쪽이 됐든 득이 될 것도, 실이 될 것도 없다. 둘 중 하나의 나로만 존재할 필요도 없다. 어디에서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면 그만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 어쩐지 부유하고 있다는, 정처 없이 떠다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고 조마조마한 이유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인가 싶은 것이다.
어딘가 완전히 정착하고픈 바람을 품으면서 그것이 어떤 형태의 삶인지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구체적인 기준이나 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도 어디에도 마음을 온전히 주지 못했고 언제라도 떠날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이 뭣도 아닌 방랑자적 태도를 수긍할 만한 합당한 이유를 찾을 길이 없다. 모국을 떠나 외국에 나가 살기 때문이라는 핑계가 그나마 둘러대기 쉬운 것이다.
한국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하루하루 지나는 게 아까울 정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반갑다. 귀로 흘러 들어오는 대화는 딱히 집중하지 않아도 죄다 알아듣는다. 하고픈 말도 막힘없이 술술 뱉는다. 급체한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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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도 때때로 캐나다의 내 방을 떠올렸다. 한적한 동네 산책길과 해질녘 보랏빛 하늘과 느리게만 흐르는 시간과 이국땅에 고립된 채 침잠하는 나를 떠올렸다. 이것은 그리움일까? 그저 본능적 회귀의 감정일까? 한국에 와서는 캐나다를 떠올리고 캐나다에서는 한국을 떠올리는 이 아이러니한 현상은 도대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