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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루 Jun 08. 2024

시간이 고여있는 곳

작년 말 회사보험으로 안경을 하나 사려고 안경점에 갔었다. 내 눈은 고도 난시라 렌즈 압축을 여러 번 해야 하는데 한번 할 때마다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몇 달 뒤 한국을 갈 예정이라 렌즈는 그때 맞추기로 하고 테만 구입했다.

한국 와서 며칠 있다가 그때 산 안경을 들고 남대문 시장에 갔다. 골목 안 낡고 허름한 건물 계단을 오르니 시장만큼이나 오래된 안경점이 있었다. 안경사가 대여섯 명에 이르는 큰 매장이지만 수많은 안경과 상자가 어지러이 쌓여 있고 손님이 인산인해를 이뤄 좁게 느껴졌다. 잠깐 기다렸다가 차례가 되어 시력검사를 하고 렌즈를 맞췄다. 안경이 완성되는 데 삼십 분이 걸린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가게를 나와 시장을 구경했다. 즐비한 상점을 지나 개미굴 같은 골목 사이를 걸었다.

거대한 상가가 연이어 붙은 곳의 지하로 들어서자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때가 언제인가? 가늠이 안될 정도로 까마득하다. 옛날에는 이곳을 도깨비 시장이라고 불렀다. 처음 왔던 때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엄마를 따라서다. 미제니 일제니 하는 수입 물품을 쉽게 볼 수 없던 시절이었다. 형형색색의 수입 과자와 낯선 이국의 식재료를 구경하느라 눈이 핑핑 돌았었다. 이후 수십 년이 흘렀지만 이곳은 그다지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물건들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다. 커다란 철제 쟁반을 식탁 삼아 밥을 먹는 상인의 모습도, 계단 아래 낮은 의자에 앉아 먹던 국숫집도 그대로였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다 자라 이젠 늙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바뀌지 않은 것은 없다. 낡고 닳고 사라지고 변했다. 종종 시간이 너무 앞서간다는 생각을 다. 내 영혼은 그보다 느려서 항상 몇 발짝 뒤에서 헐레벌떡 쫒아가는 기분이다.

이곳의 시간은 고여있는 듯하다.  긴 세월 같은 자리, 뿌리가 깊숙이 박혀 웬만해서는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안경 값을 치르다가 오천 원 바가지를 쓴 것을 알았다. 처음에 나를 상대한 아저씨는 오만오천 원이라고 했는데 다 된 안경을 건네주는 아저씨는 오만 원이라고 한다.

오만오천 원 아니고요? 내가 되묻자 아저씨는 상세 가격이 적힌 장부를 꺼내 계산기를 두드린 뒤 오만 원이라고 말한다. 실수인지 고의인지 알 수 없으나 처음의 아저씨가 오천 원 가격을 높여 불렀다. 상황을 눈치챈 첫 번째 아저씨가 눈을 찡긋 대며 어떤 신호를 보내고 나중 아저씨가 서둘러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아무 소리 안 하고 오만오천 원을 내고 나왔다. 오천 원 바가지가 하나도 안 아까웠다. 캐나다 안경점에서는 렌즈 한 짝에 백오십 불씩 두 짝에 삼백불을 달라고 했었다. 가격은 둘째치고 주문한지 단 삼십 분 만에 안경을 받아 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울 지경이다.





안경점을 나왔을 때는 오후 여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해 하늘은 흐릿한 남색이었다. 상점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었다. 낮의 활기가 물러난 시장은 조용했다. 어둑어둑한 가게 안 작은 티브이 화면이 점멸하는 불빛처럼 반짝였다.

잘 있거라. 속으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 기약이 없다.

시간은 또 흐를 테다. 나는 다시 타국으로 돌아가 일상을 이어갈 것이다. 오래된 안경점과 수입품 파는 지하상가의 존재 따위 기억 저편으로 물린 채 지낼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장은 지금처럼 같은 자리 그대로 있어 주기를. 다시 찾았을 때 똑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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