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은 호랑이 흉내를 내고 있었다. 으르렁으르렁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놀이터 바닥을 네발로 기고 있었다. 교사들은 손과 옷이 더러워지니 그만 일어나라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물론 아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걱정은 붙들어 매자. 만 3세 남자아동의 일상이란 이처럼 어처구니없고 바보 같은 행동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니까 네발로 기거나 교사의 지시를 깡그리 무시하는 정도는 지극히 일반적인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에밀리아는 모래사장 한쪽에 앉아 얌전히 모래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제 막 세 살 된 꼬마숙녀로 백인 아빠와 중국계 엄마를 둔 혼혈이었다. 소녀는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럽고 광채 나는 노르스름한 피부와 흡사 별을 박아놓은 듯 반짝이는 암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풍성하고 구불구불한 연갈색 머리칼은 가슴팍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봉긋한 이마 가장자리로는 사랑스러운 잔머리가 소용돌이쳤다.
크리스천의 으르렁대는 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에밀리아는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네발로 기어서 다가오고 있는 소년을 발견하자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다가가 손을 뻗어 크리스천의 차돌처럼 단단하고 암팡진 머리통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소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별안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에밀리아는 예의 천사 같은 얼굴로 방긋 웃었다. 소년은 쑥스러운 듯 볼을 붉혔다.
갑자기 에밀리아가 줄을 잡는 시늉, 그러니까 개의 목줄을 붙잡는 듯한 시늉을 하며 "이리 온, 아가! 이리와!" 하며 걷기 시작했다. 크리스천은 얌전히 에밀리아 뒤를 따랐다. 물론 여전히 네발로 기면서. 으르렁 소리는 더 이상 내지 않았다.
에밀리아가 호랑이를 산책시키는 건지 개를 산책시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크리스천의 역할 변화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방금 전까진 용맹한 호랑이였으나 단번에 온순한 애완견으로 탈바꿈했다.
크리스천이 잘 따라와 주자 에밀리아는 까르르 웃었다. 소녀가 웃을 때마다 소년의 입도 헤벌쭉 벌어졌다. 크리스천은 더욱 열심히 네발로 기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마치 실제로 목줄이라도 찬 듯 소녀가 가자고 이끄는 데로 따라갔다.
둘은 한동안 함께 놀았다. 산책 놀이가 끝난 뒤에는 모래사장에 앉아 땅을 팠다가 둔덕을 쌓다가 하면서 모래 놀이를 했다. 크리스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절대 한자리 가만히 앉아 모래 쌓기 따위를 즐기는 녀석이 아니었다. 소년은 취미에도 없는 놀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거나 고통을 참아가며 인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소녀의 웃음 한방이면 그것으로 충분해 보였다.
크리스천은 숙녀에게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젠틀맨이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답이 없는 꼴통 중에 꼴통이지만 미래에 분명 그리 될 것이다. 싹수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