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봄 이맘때쯤 한국을 간다. 5월은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기 때문에 여행 가기 좋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직장에 2주간의 휴가를 냈다. 내일이면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떠나기 몇 주전부터 무척 분주했다. 가족과 친구들 선물을 산다고 성격에 안 맞는 쇼핑 하느라 주말마다 녹초가 됐다. 입 짧은 열두 살 노견의 식사도 따로 챙겨놔야 하고 잡다하게 처리하고 정리할 집안일도 있었다. 직장에서도 바빴다. 어린이집 교사가 제일 바쁜 때가 마더스데이(Mother's day), 파더스데이(Father's day), 크리스마스가 낀 주간이다. 이번 주가 마더스 데이 주간이었다. 마더스 데이 선물과 카드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표면적으로 아이들이 만드는 것이지만 전체 공정의 80프로는 교사의 몫이다. 스물다섯 명 아이들의 만들기를 하나하나 옆에서 지도하고 다듬고 포장하고 각자 사물함에 안착시키기까지 총 나흘이 걸렸다. 겨우 한숨 돌리나 싶지만 바로 내일 출국하기 때문에 이제는 여행 짐을 싸야 한다.
한국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도착하기 직전까지의 여정은 거의 중노동에 가깝다. 여행에 있어서 가장 설레는 순간은 정작 여행지에 도착해서가 아니고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는 전혀 아니다. 짐가방 하나 달랑 싸들고 휴양지로 떠나는 여행이라면 이렇게 피곤하지는 않을 것이다. 해외 사는 사람의 고국행은 여행이라기보다 업무와 생활 중간쯤이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일례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써야 하는 체크카드를 살펴보니 이미 몇 달 전에 유효기간이 지나 있다. 본인인증 등의 문제로 해지하지 않고 그대로 둔 휴대폰 요금을 자동 이체해 놓았는데 카드가 정지되는 바람에 요금이 몇 달째 연체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은행에 들러 카드를 발급받고 미납된 휴대폰 요금을 해결해야 한다.
병원 방문도 빼놓을 수 없다. 캐나다에서는 중병에 걸리지 않고서야 전문의를 만날 수 없다. 한국에 가면 산부인과, 피부과, 치과 등 병원 순회를 돈다.
한국에서 사가야 할 물건 리스트는 이미 빼곡하다. 국내산 고춧가루라던가 방앗간에서 짠 참기름, 저온압착 들기름 같은 캐나다에서 구할 수 없는 식재료는 물론이고 질 좋고 저렴한 화장품과 생활용품도 사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의 쇼핑은 생활형 장보기에 가깝다. 여행지의 기념품 가게나 특색 있는 상점에서 하는 우아한 쇼핑과는 거리가 멀다.
낯선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풍경을 감상하는 일도 거의 없다. 대신 지인과 친구를 줄줄이 만난다. 평소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살지만 이때만큼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약속을 잡는다. 벙어리처럼 꾹 다물고 있던 입도 이때 잠깐 터진다. 직장이나 형식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나를 말이 없는 과묵한 이로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친밀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 앞에서는 거의 방언 터지듯 수다를 떤다.
머무는 동안은 전투적인 자세로 싸돌아 다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말을 쏟아낸다. 도파민이 과다 분출된 상태로 이때는 피로감조차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한국 방문은 휴식, 여유, 휴양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캐나다로 돌아오면 한동안은 후폭풍에 시달린다. 신기하게도 한국에 도착해서는 시차적응이 바로 되는데 정작 돌아와서는 시차적응이 힘들다. 밤낮이 바뀌었던 기간은 단 2주에 불과하지만 원래 패턴으로 돌아오는 데는 거의 한 달이 걸린다.
한국에 있는 동안은 신이 나지만 가기 전 준비 과정과 돌아와서 다시 일상에 적응하는 과정은 무척 피로하다. 단 2주를 위해 소비하는 돈과 시간과 에너지가 과도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매해 강박적으로 한국에 가는 이유는 고국에서만 해소되는 무언가 있기 때문이다. 모국어로 막힘없이 소통하며 마음속에 쌓아놓은 것들을 발산한다. 한바탕 일상이 헝클어지고 경로에서 일탈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는 어떤 내면의 변화, 자극, 깨달음이 찾아오기도 한다. 멈춰있던 물을 다시 흐르게 하고 물길의 방향을 트는 느낌이다. 그렇게 한번 속의 것을 쏟아내고 오면 고요하고 외롭고 따분한 이방인의 삶을 얼마간은 불평 없이 영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