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찡그린 미간.
오므린 입술에는 힘을 잔뜩 주고 있다.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는 것은 상단에 예시로 적힌 글자를 보느라 그렇다. 줄 하나 긋고 예시를 보고 또 하나를 긋고 다시 본다.
다섯 살 페이지는 높은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열심히 알파벳을 쓰는 중이다.
어린이집 졸업식은 6월 마지막 주에 있었다. 동시에 학기도 종료되었다. 여름동안은 놀이 위주의 써머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정규 과정과는 달리 일정이 느슨해지고 설렁설렁 놀면서 하루를 보낸다.
반면 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들은 마냥 놀 수만은 없다. 평생 처음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시작한다. 대부분 자기 이름은커녕 알파벳 ABC도 쓸 줄 모른다. 물론 읽고 쓰기를 못해도 상관없다. 그걸 배우려고 학교에 가는 거니까 그때 가서 배워도 된다. 이 나라는 그런 분위기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름정도는 쓸 줄 알아야 학교 수업 따라가기가 좀 수월할 것이다. 우리의 학습 목표는 단순하다. 입학 전까지 자기 이름은 쓸 줄 알 것. 나름의 선행학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올해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학교에 입학할 아이들은 총 아홉 명이다. 다른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동안 이들은 따로 글씨 쓰기 연습을 한다. 공부를 낮잠시간에 하는 이유도 있다. 학교에 들어가면 낮잠시간은 더 이상 없다. 이제부터 낮잠 자지 않는 습관도 들여야 하는 것이다.
낮잠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 퍼지면 아홉 명의 아이들은 옆 교실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책상 앞에 앉아 알파벳과 숫자를 읽고 쓰고 이름 쓰기도 연습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 각각의 학습능력은 단번에 판가름이 난다.
'음, 요놈은 학교 가서도 공부 잘하겠고만.'
'이 녀석 공부는 영 젬병이군.'
캐나다에는 대학 가는 사람보다 안 가는 사람이 더 많다. 대학 안 나와도 기술만 있으면 충분히 먹고 산다. 배관공, 자동차 수리공, 목수 같은 사람들이 화이트칼라보다 벌이가 훨씬 좋은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니 이 나라에서는 꼭 공부를 잘할 필요는 없다.
그렇더라도 뭔가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우등생을 만나면 가르치는 게 무척이나 재밌어진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안다. 개떡 같은 영어로 개떡같이 설명하는데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손끝은 또 어찌나 야무진지 쓰기 까다로운 모양의 글자와 숫자도 제법 잘 따라 쓴다. 이건 설마 못하겠지 싶은 것도 단박에 해낸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탄성을 지르게 된다.
주로 여자애들이 그런 편이다. 남자애들 중에도 영리한 놈이 있지만 비율적으로 여자애들이 훨씬 많다. 성별이 가진 고유한 기질, 특성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운동처럼 몸을 쓰는 일은 사내놈들이 훨씬 잘한다. 대신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손으로 자분자분 하는 일은 여자애들이 우세하다.
학습능력이 뛰어난 영악한 계집애들은 주어진 과제를 잽싸게 해치우고는 놀러 나간다. 몇몇이 그리하면 아직 과제를 끝내지 못한 아이들은 괜히 엉덩이를 들썩이며 영 집중을 못한다. 빨리 놀러 나가고 싶어서 개발새발 휘갈겨 쓰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는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는 아이들은 학습 능력과 무관하게 그다지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페이지는 굳건한 바위 같다. 엉덩이를 들썩이지 않는 유일한 아이다.
습득이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한다. 과제를 받아 들면 곧바로 몰두한다. 글자 하나하나 신중히 공들여 쓰기에 시간은 꽤 오래 걸린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주의력은 한 번도 흩어지지 않는다. 주변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뜰 때조차 고개를 들지 않는다.
집중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 아니 경이롭다는 표현이 맞을까? 주변에 보이지 않는 장막을 친 듯하다. 그 사이에는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는 침묵이 흐른다.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오롯이 단 하나와 대면한다. 그 순간, 그 모습을 목도할 때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감동을 받는다.
오늘도 페이지는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다. 남들이 모두 떠났다는 사실조차 아이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는 그런 페이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즐겁다.
집중하느라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쬐끄만 입이 귀엽다.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있어서 이마밖에 보이지 않는데 작고 동그란 이마는 또 어찌나 야물딱진지!
한참 있다가 아이가 고개를 든다. 과제로 내 준 종이를 마치 공들여 작업한 예술 작품처럼 소중히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와서는 검사를 맡는다. 또박또박 정성껏 쓴 글씨는 딱 페이지 같다.
폭풍 같은 칭찬을 쏟아낸다. 아이는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히죽 웃는다.
"페이지야, 너는 글씨 쓰는 게 어렵지 않니?"
내가 묻자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니요. 너무 재밌는걸요. 한 장 더 써도 되나요?"
"그럼그럼, 물론이지."
아이는 종이 한 장을 더 받아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쯤 되면 아이에게 공부는 일종의 놀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페이지야. 너네 부모는 복 받았다. 평생 공부해라 잔소리할 필요가 없겠구나. 무시무시한 학부모 면담시간에도 늬 부모는 교사로부터 칭찬 한 바가지 듣겠지. 네가 자랑스러워서 엄마아빠는 어깨가 으쓱으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