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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루 Feb 06. 2024

진정한 사랑의 이해

이민 초기에 나는 두문분출하고 있었다. 외출을 하려 집을 나서다가도 아파트 복도에서 인기척이 나면 문 앞에 가만히 서서 그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는 했다. 바깥에 아무도 없는 게 확인되면 그제야 문을 열었고 복도에서 행여나 누구와 마주칠까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의무적으로 뱉어야 하는 짧은 인사가 당시에는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서툰 언어로 더듬어 대는 내 모습이 어쩐지 진짜 바보 같아 보여 입을 떼는 게 싫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한 명 정도 있었으면 싶다가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사실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할 필요조차 없었는데 실제 주변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나를 따라 이 나라로 건너온 개 두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낯선 도시의 겨울은 비만 내렸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법은 거의 없지만 차가운 습기는 곳곳에 침투하여 몹시 춥게 느껴졌다. 오후 4시쯤이면 해가 졌고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인적 하나 없이 텅 비곤했다. 겨울의 이곳은 마치 죽음의 도시 같다고, 영화 속 고담시가 실재한다면 딱 이렇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팍팍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대 위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면 안은 항상 따뜻했다. 내가 없는 동안 개들이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만했다. 개가 옆구리나 발치 어딘가 자리를 잡고 몸을 바싹 갖다 붙이면 따뜻했다. 그나마 개들이 있어서 좀 낫다고,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다.




내 개는 둘 다 수컷이고 한배에서 나온 형제였다. 어미개는 마당에서 짬밥을 얻어먹으며 묶여 지내다가 가끔 줄이 풀리면 여기저기 동네를 돌아다녔다. 강아지들의 아비개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개 주인이 새끼 한 마리를 3만 원에 줄 테니 데려가 키우라고 했다. 나는 태어난 지 두 달 남짓한 대여섯 마리의 강아지를 구경하다가 그중 가장 예쁘게 생긴 놈을 골라 들었다. 강아지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손길을 벗어나려 버둥댔다. 누군가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길래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른 강아지 한 마리가 바지 끝단을 물어뜯고 있었다. 시선을 주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빤히 올려다보았다. 강아지는 눈 한쪽이 없었다. 녀석은 명랑하게 꼬리를 흔들어 댔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동안 손을 핥고 깨물며 장난을 걸었다. 개 주인은 그놈은 눈이 성치 않으니 2만 원만 받겠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을 뜨지 못했지만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덧붙여 말했다. 외눈박이 강아지가 가엾게 느껴졌지만 눈 두쪽 다 있는 예쁜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다. 처음에 눈여겨본 겁 많은 강아지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주인에게 값을 치르는 동안에도 눈 한쪽 없는 강아지는 자꾸만 신발을 물고 늘어졌다. 녀석을 발에서 떨어뜨리느라 애를 먹었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예쁜 강아지를 품에 안고도 기쁘지가 않았다. 뒤에 남기고 온 강아지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집에 데려온 강아지는 손길을 피하고 구석으로 자꾸만 숨었다. 하루정도 지나자 체념했는지 그뒤로는 잘 따랐다. 외눈박이 강아지에 대해서는 금방 잊어버렸다.

한 달이 훨씬 지났을 무렵 우연히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른 형제 강아지들은 모두 주인을 찾아 떠났는데 외눈박이 혼자만 남아 있다고 했다.

발등 위 안쓰러울만치 가볍던 무게감.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만들던 무게감이 떠올랐다.

강아지가 어쩐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재회한 강아지는 그새 많이 자라 있었다. 형제가 모두 떠난 자리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예쁜 강아지를 데려올 때와 똑같이 주인에게 3만 원을 건네주고 강아지를 안고 나왔다. 외눈박이 개는 그렇게 나에게 왔다.




한동안은 평탄하다가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순간이 있었다. 잠을 설칠 만큼 흥분되고 신나던 때도 드문드문 있었고 슬프거나 힘들거나 화나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시기도 있었다.

어떤 꿈은 좌절됐지만 다른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예전엔 좋았던 것이 더 이상 좋지 않거나 싫었던 것이 그럭저럭 견딜 만 해지기도 했다. 한때 가까웠던 누군가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지만 새로운 인연이 찾아오기도 하고, 그랬다. 이토록 불연속적이고 불확실한 삶 속, 변하는 마음과 식어버리고 마는 애정과 변덕스러운 감정 사이, 개 두 마리만 그대로 곁에 있었다.

나는 생명을 책임지고 부양하는 행위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르는지 몸소 깨치고 있었다. 이기적이고 게으른 내가 그러한 희생을 군소리 없이 감내하고 있는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특별히 노력을 한 건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개를 키운 뒤부터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야윈 길고양이나 먼지를 뒤집어쓴 채 아스팔트 위를 쪼아대는 도심 속 새와 같은 다른 동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겨울이 되면 따뜻한 물그릇을 문 앞에 두었다. 고양이도 참새도 까치도 비둘기도 목을 축이고 갔다. 동물을 염려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다 보니 자연훼손되고 지구가 오염되는 상황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마트를 갈 때 장바구니를, 외출할 때는 손수건과 물병을 챙겨 나가기 시작했다. 개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나라는 인간은 전보다는 주변에 해를 덜 끼치는 인간이 되었다.




맹목적인 믿음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과 판단 없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말하자면, 사랑에 대해서다.

판타지 소설 같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할까? 아무나 게 남발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은 솔직히 까놓고 보면 이기심과 인정욕구의 혼합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도 내가 용서가 안되는데 하물며 타자를 온전히 수용하는 게 가능할까? 사랑이라는 단어 냉소를 품었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다. 나의 쓸모를, 누군가의 쓸모를 가늠했다. 쓸모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고 치부하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놀고먹고 대자로 뻗어 자는 개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쓸모없이도, 그저 존재만으로 축복이 될 수 있구나. 하물며 개도 그럴진대 사람이라고 안될까? 

나도, 그 누구라도 존재만으로 축복이 될 수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개와 나, 이 관계 속 서로가 나누고 있는 감정에 대해 정의 내리고 싶었다. 쓸모와 조건과 대가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는 현상과 가슴을 가득 채우는 이 아릿한 감정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세상에 사랑은 분명 존재했다. 만약 나에게 자식이나 종교가 있었다면 그것을 통해 배웠을지 모르겠으나 둘 다 없는 나는 내 개를 통해 배웠다.




비 내리는 겨울, 즐기는 활동이 하나 있다. 비를 맞으며 을 산책하는 것이다. 만약 개가 없었다면 젖은 숲에서 나는 향기를 맡을 기회는 영영 없었을 테다. 숲은 인적이 없고 사방이 고요하다. 낙엽과 나뭇가지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릴 뿐이다. 옅은 안개가 얼굴을 감싸고 발 밑으로는 젖은 낙엽이 푹신하게 밟힌다. 대기는 젖은 낙엽과 돌과 이끼뿜어내는 짙고 청량한 향기로 가득하다. 숲 속에 개를 풀어 두고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외눈박이 개는 용감하고 저돌적이어서 산토끼를 쫓아 수풀 속으로 맹렬히 뛰어 들어가기 일쑤였다. 나무 위 청설모를 향해 점프를 하고 물웅덩이에서 물장구를 쳤다. 젖은 낙엽과 풀 위에 누워서는 등을 비볐다. 반면에 겁이 많은 예쁜 개는 살금살금 걸어 다녔고 물웅덩이를 밟지 않으려고 빙 둘러 돌아갔다. 예쁜 개는 마른 풀밭에서는 외눈박이와 함께 곧잘 뒹굴었지만 젖은 낙엽 위에는 절대 눕지 않았다. 한배에서 났지만 둘은 아주 달랐다. 밤에 자려고 누울 때면 외눈박이를 끌어당겨 등에 얼굴을 파묻곤 했다. 부슬부슬한 털은 낡은 헝겊 인형같이 따뜻하고 포근했으며 숲에서 나던 젖은 낙엽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냄새가 무척 좋았다.





시간이 지나 이국땅에 어느 정도 정착을 하면서 초기에 느꼈던 외로움과 우울감은 점차 사라졌다. 이곳에 사는 게 어떤 면에서는 고국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숲과 공원이 널려있었고 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되려 야만인 취급하는 인식 덕분에 내 개들이 훨씬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나라로 이주한 지 5년째 되던 겨울에, 외눈박이 개토끼를 쫓아 수풀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그 속에 숨어 있던 코요테에게 목덜미를 물렸다. 는 동물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결국 숨을 거뒀다. 처치실 안에 들어가 마지막으로 개를 안아보았다. 죽었다는 수의사의 선고가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은 따뜻했다. 털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있었다. 축축한 털에서는 젖은  냄새가 났다.





이민을 온 것이 결국 개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 같아 나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코요테에게 물려 죽는 일 따위는 애초에 없을 터였다. 더 이상 숲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꽤 오랫동안 그렇게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곳을 찾았는데 홀로 남겨진 형제 개 여전히 숲에 가는 걸 사랑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찾은 숲에 들어섰을 때 그곳은 전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익숙한 향기 가득 차 있었다. 한동안 이 냄새를 잊고 있었다. 젖은 낙엽을 찬찬히 밟으며 앞서 걷는 개에게 말을 건넸다.

"모네야, 모모 냄새가 난다. 숲에서 그리운 우리 모모 냄새가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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