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나를 만나다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세찬 바람이 부는 겨울 새벽, 어둠과 고요가 짙게 깔린 시간에 나는 눈을 떴다. 따듯한 차 한잔을 우려 몸을 녹이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9년 전의 시공 속으로 살며시 발걸음 옮겨 흐릿한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둘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시공 너머 저편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은 마치 검푸른 하늘에 떠오른 새벽별처럼 선명하고 아련하게 내 안에서 반짝인다.
물속에서 건져 올린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살기 위해 힘껏 몸부림치던, 활발발한 제주 생활을 뒤로하고 발리로 다시 한번 무작정 길을 나섰다. 숙소 외엔 아무 계획 없이 홀홀 단신으로 떠나는 길, 단출한 짐과 홀가분한 마음 그리고 기분 좋은 떨림과 설렘을 가득 싣고 새로운 시공으로 훌쩍 떠났다.
“발리에서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의 여행지는 발리섬의 북쪽 고지대에 위치한 푸른 논과 숲으로 우거진 우붓이었다. 추운 2월, 발리의 열대 기후는 나를 한순간에 낯선 시공간으로 데려다 놓았다. 우붓을 거닐다 보면 어디서나 은은하게 퍼져오는 달콤한 향이 콧속으로 기분 좋게 퍼지면서 마음까지 산뜻하게 해준다. 알고 보니 그 향은 우붓 곳곳에 흔하게 피어있는 플루메리아 꽃향기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펼쳐진 다섯 장의 꽃잎은 중심으로 갈수록 옅은 노란색으로 물들어, 햇살이 스며든 새벽안개처럼 은은한 빛을 띤다. 매끄럽고 실크처럼 부드러운 꽃잎은 손끝에 닿으면 고요한 온기를 전해줄 듯했다. 순백의 청초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나무에 가득 피어있는 플루메리아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바람을 타고 퍼지는 향은 달콤하고 은은해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마음 깊은 곳에서 평온함이 피어오른다. 그 향에 매료되어 매일 아침 떨어진 꽃송이를 주워 향을 맡고 머리에 꽂고 다니기도 했다. 나에게 발리는 곧 ‘향기의 섬’이었다. 지금도 발리를 떠올리면 나의 코끝에선 플루메리아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른다.
궁금해서 플루메리아 꽃말을 찾아보았다. “새로운 시작”, “영원한 사랑”, “당신을 만난 것은 행운입니다”, “축복받은 사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발리로 떠난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해 주고 매 순간을 축복해 주며 사랑을 전해준 건 플루메리아였다.
나는 지인이 소개해준 숙소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했다. 작은 문을 통과해 좁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세 채의 건물과 가운데 꽤 넓은 중정이 딸린 숙소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당 왼편에는 사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있었다. 신들의 섬이라 불리는 발리, 우붓의 집집마다 작은 개인 사원을 두고 있다. 아침마다 제단 위에 향을 피우고 ‘차낭 사리’라고 불리는 제물을 바친다. 코코넛 잎으로 손수 싸서 만든 손바닥 만한 크기의 다양한 모양의 작은 바구니 안에 형형색색의 꽃잎과 밥알, 사탕, 과자 등을 정성스럽게 담아 제단에 바친다. 그들의 일상은 늘 신과 연결되어 있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듯했다.
매일 제단에 올릴 차낭을 넉넉히 준비하기 위해 앉아서 차낭을 만드는 여인들의 모습을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들에게 일상이 기도이고 신과 연결하는 행위 자체인 듯했다. 신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늘 미소를 잃지 않는 발리인들의 일상과 신과 그 일상을 함께 하는 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고 그런 삶의 태도를 나도 조금씩 배워갔다.
행운이 따라준 덕분에 나는 이 숙소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자랑하는 이층에 머물게 되었다. 퀸 사이즈 침대와 넓은 테이블, 화장실과 샤워실이 딸린 널찍하면서도 정갈한 방이었다. 아침마다 테라스에서 여주인장 마데가 직접 준비한 조식을 먹으며 바라보던 풍경은 지금도 마음 한편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어쩌면 우린 이런 찰나찰나의 순간 속에 영원히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코코넛 가루로 얇게 구운 전병, 한가득 담아주는 파파야 등 다양한 달콤하고 싱싱한 열대과일 그리고 진한 인도네시아 커피, 아침마다 미소 가득 조식을 들고 올라오던 마데의 모습과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던 발리의 아침은 나에게 사랑이었다.
우붓에서의 최고의 교통수단은 단연 스쿠터였다. 한 달간 나의 두발이 되어 줄 스쿠터를 숙소에서 빌리기로 하고 급하게 운전 교습까지 받았다. 처음엔 덜덜 떨며 서툴게 운전했지만, 얼마 안 가 나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어 종횡무진 우붓 곳곳을 탐색했다. 뒤에 사람을 태우고도 인파 속을 요리조리 뚫고 다니는 현지인 못지않은 운전실력을 뽐냈다. 고삐 풀린 말처럼 바람을 만끽하며 쌩쌩 논두렁 길을 달리던 쾌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스쿠터는 나에게 또 다른 자유의 상징이었다.
요가의 성지로 불리는 발리에서의 하루는 당연히 아침 요가로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요가 반 yogabarn(그때 당시 가장 큰 스튜디오였는데 지금은 모르겠다)으로 아침 수련을 갔다. 요가 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요가 클래스가 시간대별로 꽉 채워져 있고 세계 각국의 요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는 요가 천국이었다. 요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삐걱거리는 몸뚱이와 귀로 흘러들어와도 해석하기 힘든 영어 단어들을 애써 조합하며 눈치코치로 겨우겨우 자세들을 따라 했다. 정신없이 따라 하기 조차 힘든 온갖 자세를 당최 말을 듣지 않는 팔과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가며 안간힘을 쓰다 보면 길고 긴 한 시간이 지나간다. 그리고 손꼽아 기다리던 순간이 온다. 바로 송장자세로 누워 쉴 수 있는 꿀 같은 쉼의 시간. 땀 벅벅이 된 몸뚱이를 바닥에 내맡긴 채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양한 새소리에 귀를 내어준다. 코끝을 간질거리며 콧구멍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향기를 맡으며 누워있으면 온몸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고,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물 밀듯이 밀려와 가슴이 벅찼다.
“살아있구나! 살아있어서 감사합니다!”
요가 초보인 나는 요가 반에서 하루종일 이런저런 요가 수업들을 끌리는 대로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요가
반 노천카페에서 다양한 메뉴들을 시켜 주린 배를 달리기도 했고 애정했던 레몬허니진저티를 시켜놓고 책도 읽고 순간을 기록하며 나로 가득한 나날들을 보냈다.
우붓에서 지내는 동안은 오직 채식 식단으로만 식사를 했다. 어딜 가든 베지테리언 푸드 옵션이 있었고 야채와 과일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먹거리가 풍부한 열대지방이라 몸에선 육고기를 전혀 원치 않았다. 싱싱한 생과일주스, 다양한 디톡스 주스, 신선한 코코넛워터를 매일 마실 수 있었고 채식과 비건 맛집이 넘쳐나는 우붓에선 아름다운 뷰가 보이는 노천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매일 풍요롭고 건강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잘 먹고 잘 자고 매일 요가하고 기도하며 나에게 애정을 듬뿍 쏟고 지내다 보니 어느새 거울 속에 비친 나는 피부가 반짝반짝 빛나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발리에서 나로 온전히 살아가는 법을 천천히 배우기 시작했고 나를 사랑하는 법을 하나씩 배워갔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어떤 것이 나를 억누르고, 어떤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지, 나에 대해서 이토록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그곳에서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나로 살아가는 진짜 삶을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