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의 1년

건강한 관계의 시작은 솔직함이다

by kaei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어요?”

“아니요.”

“그럼, 혼자 오셨나요?”

“네.”

“현재 4인 도미토리 혹은 개인실 숙박이 가능합니다.”

“도미토리로 하겠습니다.”

“내일 조식은 미리 신청하셔야 하는데, 신청하실 건가요?”

“네.”

“그럼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은 카페이고 밤 10시까지 머무르실 수 있습니다. 방은 이쪽입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홀로 배낭 하나 메고 오신 30대 중후반의 남성이었다. 간단한 대답만 하고 안내해 준 방으로 들어가서는 한참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숙소 호스트로 이런저런 손님들을 만나다 보니 말을 아껴야 하는 사람과 탠션을 높여 응대해야 하는 손님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름 사람을 보는 눈썰미가 생겼다고나 할까. 사무적인 말투를 상냥한 어조로 바꾸는 데는 꽤 애를 먹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일과는 아침부터 밤까지 쉴틈이 없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조식 준비하러 주방으로 간다. 메뉴는 세 가지인데 인도 스타일 난을 굽거나, 아메리칸 스타일 팬케익 그리고 주인장이 개발한 방울빵(한입 크기의 구운 빵에 버터와 한라봉잼을 올려 먹는다)이 있다. 세 가지 메인 식사와 함께 양식스타일의 단호박 수프와 계절 채소로 준비한 샐러드가 제공되는 조식은 매일매일 랜덤으로 돌아가면서 손님들에게 서빙한다. 이 세 가지 메뉴는 지금도 눈 감고도 만들 수 있다.

아침 조식을 주인장과 같이 준비한다. 식사준비를 마치면 아침 식사를 알리는 종을 치는데 그 종소리를 듣고 식사를 예약하신 손님들은 하나둘 카페로 모이기 시작한다. 차례로 서빙해드리고 드시는 방법을 설명해드리고 나서는 커피 주문을 받는다. 식사하는 동안 커피를 내려 드리고 나면 또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다. 숙박 손님이 많은 날은 손이 10개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아침 조식 시간은 모든 숙박객들이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화합의 시간이기도 하다. 서빙이 끝나면 나도 커피 한 잔 들고 그 무리 속에 가담한다. 그렇게 친해지면 그날 하루 같이 여행도 다니고 며칠 동안 함께 숙소에 묵으면서 사이가 무척 돈독해지기도 한다. 지금 제주는 커플 혹은 가족끼리 여행 많이 오지만 그때는 홀로 배낭으로 오시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어서 더 낭만적인 감성이 짙었던 것 같다.

아침 조식 끝나면 객실 청소, 샤워실과 화장실 청소를 한다. 청소가 끝날 즘 점심시간이 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오후에는 카페지기로 카페로 놀러 오시는 외부 손님과 숙박 손님들을 응대한다. 내가 머무는 게하(게스트하우스 약칭)는 체크인 시간이 정해지지 않아 수시로 숙박 손님이 체크인하시기 때문에 대부분 시간은 카페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후 시간에 게하를 비워두고 여기저기 손님들과 놀러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게하의 저녁은 매일 시끌벅적했다. 손님들끼리 모여 음식을 준비하기도 하는데 운 좋게 세프가 숙박객으로 오는 날은 파인다이닝 못지않은 파티가 열린다. 음식과 다양한 주류가 모이면 손님들이 한 명 두 명 모여들기 시작한다.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이 나이, 이름을 서로 묵인한 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밤의 게하는 인간적이고 따뜻했다.

매일매일 사람들이 오고 가고, 오랫동안 머무는 손님들이 친구가 되어가기도 하고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또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하며 매일 이별과 만남이 교차하는 버라이어티 한 삶을 살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을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다양하게 만나 본 것도 숙소 호스트로 있었던 그때뿐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 많은 일들을 겪고 상처받기도 하고, 배우고, 성장했다. 많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관계를 맺다 보니 감정적으로 통제가 안 되는 상황들이 가장 힘들었다. 워낙 예민하고 감수성이 발달한 나는 사람들의 감정변화나 제스처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 눈치를 많이 살피게 되고 불편한 상황을 편히 넘기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감정들이 있는 그대로 얼굴이나 어조에 묻어나기 일쑤였다. 상황을 조율하려고 애쓰다 보니 거절을 잘 못하고 나의 의견을 똑 부러지게 이야기하지도 못해 늘 주변에 휩쓸려 이리저리 휘둘리며 힘들어했다.


아까 입실했던 남자 숙박객이 밤 8시쯤 카페로 들어왔다.

“카페는 10시까지 편히 계시면 됩니다. 혹시 음료 주문하시려면 말씀하세요.”

“혹시 허브차 같은 건 있나요?”

“네. 페퍼민트차 가능합니다.”

“네! 한잔 주문 할게요.”

차를 한 잔 주문하고 그는 창가 쪽에 앉았다.

“주문 한 차 나왔습니다.”

차를 건네고 나도 차 한 잔 우려서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잔잔한 음악이 부드럽게 우리 사이로 흐르며 침묵의 공간을 편안함으로 채워주고 있었다.

그는 가지고 온 책을 펼쳐 읽었고 나는 스케치 북을 꺼내 기억 속에 캡처해 두었던 오름 이미지를 끄집어내며 끄적거렸다.

아무 말도 없이 잔잔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곧 카페 마무리 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아! 네. 그럼 내일 뵐 겔요.”

“안녕히 주무세요.”

“저기 혹시, 내일 근처 오름 가고 싶은데 추천해 줄 곳이 있나요?”

“따라비오름, 큰사슴오름 추천해요. 저도 내일 오프라 오름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아! 좋습니다. 제 차로 모실게요.”


다음날, 조식을 먹고 오름 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스태프 언니가 자기도 함께 가고 싶다면서 따라나섰다.

“연아, 오늘 우리 동쪽 갈까? 내가 전부터 가고 싶었던 가게도 있었는데 같이 가자.”

조수석에 올라타면서 언니는 다짜고짜 자기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자고 제안을 했고 우리 둘은 암묵적으로 “싫어”를 웨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나는 늘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데 적응되어 있었고 그 언니도 늘 자신의 의견을 고분고분 따르던 나한테 당연하다는 듯 나의 의견은 묻지도 않았다.

그분도 그저 아무 말 없이 시동을 걸었다. 묵묵히 그녀가 이야기하는 곳을 목적지로 검색하고 출발을 했다.

“이건 나의 휴일인데… 내가 왜 이 사람의 생각을 따라 갈 마음도 없는 곳으로 가야 하지?” 속에선 부글부글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몇 번인가 되삼 키며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의 열기를 내리려고 창문을 열고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빠르게 달리는 차창으로 밀려들어오며 얼굴을 빠르게 통과해서 흩어졌다. 그 순간 정신 번쩍 든 나는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내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줬지만 오늘은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기분에 맞추기 위해 나의 감정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욕구를 솔직히 표현하고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맺는데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감정을 빼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 미안하지만 오늘 나의 휴일은 내가 계획한 것들을 하고 싶어. 나는 큰사슴오름 가고 싶어. 나는 거기서 내릴 테니 언니는 언니 계획대로 해. SJ님도 본인 스케줄이 있으시니 가는 경로를 의논해 보자.”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한참 말이 없었다. 처음으로 내가 목소리를 냈고 목소리엔 단호함과 당당함이 묻어있었던지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무척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난 다시 게하로 데려다줘. 난 오늘 카페도 봐야 하니까 시간이 안 맞겠네.”

“그럼 그렇게 해.”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분 나쁜 표정으로 차에 내리는 그녀를 보면서 미안한 감정보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쾌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밀려왔다. 스스로 감싸고 있던 껍데기를 깨고 나와 훨훨 날아오르는 나비같이 자유롭고 속이 뻥 뚫렸다.

그날, 나는 최고의 휴일을 누릴 수 있었고 가장 나다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나에게 가장 솔직했던 그 순간의 짜릿함과 처음으로 나 자신을 위해 단호하게 던졌던 “NO”는 나를 더욱 자유롭게 해 준 하나의 관문이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수도 없이 반복하는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건강하게 나를 지키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으며, 지금까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소중한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 제주에서의 1년은 나의 삶에 다채로운 경험들을 남기고 간 한 여름밤의 꿈같은 시간들이다. 수없이 많은 감정, 느낌들이 뒤섞인 순간들 중에 진하게 남아있는 건 낭만과 사랑, 우정, 웃음, 성장통, 감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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